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연출한 영화 스파이의 아내.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구로사와 기요시(黑澤淸·65)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는 지난달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감독상(은사자상) 수상작. 2차 대전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생체 실험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룬다. 이 영화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구로사와 감독은 26일 상영을 앞두고 열린 온라인 간담회에서 “이 영화에서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작업을 새롭게 한 것은 아니다. 이미 일본이나 세계에 역사로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그리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그가 반복해서 사용한 말은 ‘성실하게’였다.

‘스파이의 아내’는 1940년 일본 무역상이 만주에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일본군의 생체 실험 기밀 자료를 입수한 뒤 양심적 갈등을 겪는다는 내용을 지닌 가공의 드라마다. 영화에서 무역상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고민하다가 행동에 동참하는 여주인공 역할은 아오이 유(蒼井優·35)가 맡았다. 아오이 유는 봉준호 감독이 공동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도쿄!’에 출연해 친숙하다. 구로사와 감독은 그의 연기에 대해 “서류 봉투를 건네받는 장면에서 기밀의 내용을 모르는데도 순간적으로 강인한 표정을 지으면서 심리를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빼어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또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현장에서 촬영에 들어가면 이해력이 빠르고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라고 말했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구로사와 감독은 1983년 데뷔 이후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부문’에서 두 차례 수상한 일본 영화의 거장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2003년 ‘도플갱어’를 개막작으로 상영하고, 2012년 젊은 영화인을 육성하는 아카데미 교장을 맡아서 인연이 깊다. 이번 영화는 그가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도전한 시대극이다.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75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의 전쟁 범죄가 일본 영화인들 사이에서 금기가 되고 있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스파이의 아내'가 논쟁이나 스캔들을 일으키기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가 잊히도록 하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고도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그는 “가까운 근현대사를 다룰 경우에는 실존 인물이나 실화, 기록과 바탕으로 픽션(가공의 이야기)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주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영화는 현대사의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반전(反轉)이나 삼각관계 같은 스릴러와 멜로극의 요소도 가미했다. 도쿄예술대학에서 구로사와 감독을 사사한 두 제자가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간담회에서 그는 “모종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역사적인 하나의 시대를 마주하고 그 바탕에서 오락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영화는 지난 6월 일본 NHK를 통해서 고화질 디지털 드라마로 먼저 방영됐다. 최근 극장판도 일본에서 개봉했다. 그는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이 대히트하는 바람에 밀려서 주목을 덜 받는 편”이라며 웃었다. 한국 배급사와 국내 개봉도 추진 중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