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별세한 이종덕 단국대 석좌교수. 2016년 충무아트홀 사장에서 퇴임하던 무렵의 모습이다. /조선일보DB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센터 등의 사장을 지낸 ‘한국 1호 공연예술 CEO’ 이종덕(85)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석좌교수가 23일 오전 8시 40분 별세했다.

‘예술행정’ 혹은 ‘예술경영’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절부터 문화예술 현장 경영자로 일했던 그는 시민에게 턱없이 높았던 공연장의 문턱을 낮추고, 예술인에겐 제대로 된 환경과 무대를 가꿔주며, 반세기 동안 척박했던 우리 문화예술의 주춧돌을 놓은 거목(巨木)이었다. 늘 예술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도록 애썼고, 스스로를 ‘뒷 광대’라 부르며 무대 뒤에서 사는 삶을 자청했다.

경복중·고교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공무원이 된 그는 1963년부터 문화공보부 예술과에서 문화예술계와 인연을 맺었다. 공직 시절에도 늘 아이디어가 반짝였다. 1974년 소련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2위를 차지했을 때, 김포공항부터 서울시청 광장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인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정명훈의 쾌거는 드라마가 됐고, 한국 예술가들의 자부심을 높여준 시대의 ‘사건’이 됐다.

5년 재임한 충무아트홀(현 충무아트센터) 사장 퇴임을 앞둔 2014년 1월, 자식처럼 아끼는 충무아트홀 대극장에 선 이종덕 사장. 척박했던 우리 공연 예술의 기틀을 닦은 1세대 예술경영인이다〈큰 사진〉. 작은 사진은 2012년 충무아트홀‘ 신성일의 프로포즈’ 영화음악 콘서트를 앞두고 배우 신성일과 함께한 모습. /조선일보 DB·이진한 기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 서울예술단 이사장, KBS교향악단 이사장, 예술의전당·세종문화회관·성남아트센터·충무아트홀(현 충무아트센터) 사장을 지냈다. 지금 한국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공연장들은 그의 손을 거쳐 구태를 벗고 새로 거듭났다. 단지 하드웨어뿐 아니라 예술가들을 격려해 창작 공연을 제작하고 관객 중심의 공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 후원 유치와 재정 자립도 향상을 통해 정부에 의존하던 극장 운영 방식을 환골탈태시킨 예술경영의 귀재였다. 예술의전당에서는 재정 자립도를 39%에서 65%로 끌어올렸다. 성남아트센터에서는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뮤지컬 ‘남한산성’을 제작했고, 충무아트홀에서는 자체 제작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으로 100억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발레리나 강수진이 있던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국내 초연을 성사시켰다.

사람들의 마음을 한 데 모으고 인재를 키워내는 데도 탁월했다. 박인건 대구오페라하우스 대표, 김희철 정동극장장, 노재천 성남문화재단 대표, 안호상 전 국립극장장, 유희성 서울예술단 이사장, 이창기 전 마포문화재단 대표 등이 그와 함께 일하며 예술경영을 익혀 지금 우리 문화예술을 이끌고 있다. 사장이 직업인 것 같은 삶이었지만 신입사원이나 청년 예술가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다. 서울예술단 시절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을 뒷바라지하며 챙겼던 일, 예술의전당 사장 때 콘서트홀 앞에서 시위 중인 노조원들을 설득해 현장 투표로 즉석에서 신임을 얻어내 설립 이래 처음 3년 임기를 채운 사장이 됐던 일화도 유명하다.

2016년 충무아트홀 사장 퇴임식에서 20대 직원이 송별사를 읽다 눈물 짓고, 이 사장도 함께 눈가를 훔치던 모습은 요즘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충무아트홀 시절 함께 일했던 한 직원은 “그분의 진정성과 따뜻한 카리스마는 아무도 못 당한다. 군림하지 않으며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어 함께 일했던 분”이라고 했다. 이후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원장⸱석좌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센병 환우들이 사는 성라자로마을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옥관문화훈장(1994), 보관문화훈장(2009)을 받았다.

유족으로 아내 김영주씨와 4녀. 장례식장 성라자로마을 내 성당(의왕시 소재), 발인은 25일 오전 10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