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 패션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탈리아 패션계 거장 조르조 아르마니(91)가 4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다.
아르마니그룹은 이날 성명을 통해 “직원과 협력자들이 항상 존경과 찬사를 담아 ‘일 시뇨르(존경하는 선생님) 아르마니’로 불렀던 조르조 아르마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그는 오는 28일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아르마니 브랜드 탄생 50주년 기념 쇼를 앞두고 있었다.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로서 독보적 자질을 보이며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의 소유자”로 불렸던 아르마니가 어떤 방식으로 패션사(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지 한창 관심이 뜨거운 시기였다.
하지만 아르마니의 트레이드 마크인 은백발에, 탄탄한 체형이 돋보이는 짙은 네이비의 딱 붙는 티셔츠를 입고 런웨이(쇼 무대)에 올라 단단한 미소로 청중에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올 1월에는 자신의 고급 맞춤복 브랜드 ‘아르마니 프리베’ 20주년을 파리에서 기념하는 등 ‘영원한 현역’다운 아우라를 풍겼던 그의 건강 이상설이 퍼진 것은 지난 6월 밀라노 남성 패션위크부터. 쇼가 끝난 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관객을 향해 인사를 해오던 패션계 관행과 달리 무대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직접 패션쇼를 지휘하지 못했다. 이후 그의 인생 가장 화려할 50주년 축하 패션쇼와 파티를 불과 20여 일 앞두고 생을 마감하게 됐다.
아르마니는 1975년 절친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세르지오 갈레오티와 함께 ‘조르조 아르마니’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세웠다. 이후 ‘우아함의 황제’ ‘미니멀리즘의 거장’으로 불리며 현대 이탈리아 패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특유의 절제된 감각과 냉철한 경영 감각을 결합해 연간 23억유로(약 3조7000억원) 매출을 올리는 세계적 명품 기업으로 키웠다.
1934년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차에서 태어난 아르마니는 원래 의학을 전공했다. 어려운 형편의 가족을 위해 밀라노 의대에 진학했으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1957년 백화점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정식 패션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백화점 바이어를 하며 스스로 디자인을 터득했다.
스물셋이 되던 해 그는 의사 메스 대신 의상을 재단하기 위한 줄자와 가위를 들었다. 패션에 민감한 이탈리아에서 ‘신성’의 탄생을 알린 건 1964년 이탈리아 출신 패션 사업가 니노 체루티가 선보인 브랜드 ‘히트맨’의 디자이너가 되면서부터였다. 의대생으로 익힌 신체 구조적 재단에 그의 평소 철학인 편안함을 결부했다. 몸의 선을 따라 흐르는 듯이 디자인한 스타일로, 남녀 구분 없이 입을 수 있는 중성적인 느낌과 옷에 속박되지 않는 인체공학적 디자인을 선보이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결국 1975년 자신의 이름이 담긴 브랜드로 ‘아르마니 스타일’ 세계를 열었다. 이탈리아 패션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안감이 없는 자유로운 재단의 재킷은 이탈리아어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무척이나 쉬운 것처럼 해내는 것)’의 대명사로 불렸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허물고, 절제되면서도 여유있는 라인으로 시대를 초월한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아르마니는 곧 ‘자연스러운 우아함’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1975년 여성복을 론칭한 뒤엔 역으로 넓은 어깨선과 날렵한 실루엣이 돋보이는 파워 슈트를 선보이며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며 자기 표현이 강한 여성들을 대변했다.
AP통신은 그를 “밀라노 기성복의 거장”으로 평가하며, 구조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디자인으로 패션계의 혁신을 이끌었다고 전했다. ‘레 조르지오(Re Giorgio·조르지오 왕)’라는 패션계 별칭으로 불린 그는 광고와 경영은 물론, 모델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머리 모양까지 직접 손볼 만큼 모든 세부 사항을 챙기는 완벽주의자로도 유명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한데 체형도 잡아주는 그의 재킷은 ‘소프트 테일러링(soft-shouldered suits)’ 시대를 열며 할리우드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1980년 배우 리처드 기어가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아르마니 슈트를 입어 유명해졌다.
아르마니의 의상은 레드카펫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브랜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소피아 로렌, 조디 포스터, 숀 코너리 등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르마니를 택한 스타들이 줄을 이었다.
디자이너로서뿐만 아니라 사업성도 능했다. 아르마니는 루이비통의 모회사인 LVMH, 구찌의 모회사인 케링 등 거대 패션 그룹들이 두각을 드러낸 세계 명품 시장에서 단독 주주로서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일궈온 몇 안 되는 디자이너로 이름을 떨쳤다. 미국의 대표 디자이너 랄프 로렌(86)도 디자인과 CEO(최고경영자)를 겸했지만 지난 2015년 외부 CEO를 영입하면서 그룹 회장과 최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직함만 유지한 바 있다.
젊은 층을 공략한 엠포리오 아르마니. 아르마니 진, 아르마니 익스체인지 등 패션 브랜드에 이어 홈 인테리어 브랜드 아르마니 카사를 비롯해 아르마니 호텔, 아르마니 뷰티 등 ‘아르마니 제국’을 세우며 억만장자 대열에 올랐다. 현재 46개국에 500여 개 매장을 운영하며, 외부 투자 없이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여겼다.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아 이탈리아 밀라노 농구팀을 인수하는가 하면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의상을 디자인하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 디자이너로 추앙받았다. 2021년 이탈리아 최고 영예 중 하나인 공로 훈장을 수상하고,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일시적인 유행보다는 현대적이면서도 클래식한 그만의 정체성을 일궈나갔고, 실용을 바탕으로 지나친 사치와 허영을 경계했다. 디테일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집착하는 그의 패션 철학은 어쩌면 단순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상처난 영혼을 위한 위로의 바느질은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숨기거나 과장하지도 않고, 간결하게 자신만의 고집을 구조적으로 표현해냈다.
“우아함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잊히지 않는 예술”이라고 강조했던 그는 복잡하고 다단하며 고단한 세상을 그는 그 누구보다도 우아하고 간결하게 해석해 내려 애썼다. “명성이 나를 이 길로 이끌지 않았다. 돈도 아니었다. 우아함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 그것이 항상 나를 움직여 온 동기다.”
아르마니 그룹은 오는 주말 밀라노에 일반인을 위한 조문실을 마련할 예정이며, 장례식은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참석하는 비공개 형식으로 치러진다. 현재까지 확실한 아르마니의 사후 후계자는 발표된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