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습니다. 어느새 집 주변의 개나리와 진달래가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고, 지도 앱에도 꽃놀이 명소들이 표시되고 있어요. 꽃놀이로 유명한 장소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예로부터 사람들은 꽃을 구경하며 봄을 만끽했어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꽃을 구경하는 풍습이 있었죠. 옛날에는 꽃놀이를 ‘상화(賞花)’ ‘심화(尋花)’ ‘간화(看花)’ 등 다양하게 불렀는데 모두 꽃을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본 봄꽃은 보통 복숭아꽃과 살구꽃이었습니다.

필운대의 복숭아꽃

과거에는 꽃놀이를 하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꽃놀이 장소는 인왕산 기슭의 필운대였습니다. 이곳은 지금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고 터로, 원래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 장군의 별장이 있었습니다. 이후 그의 사위였던 이항복이 이 집을 물려받죠. 이항복은 필운대 이름을 따 자신의 호(號)를 ‘필운’으로 지었습니다.

필운대에는 복숭아나무가 무성했고 봄이 되면 사람들이 꽃을 보러 모여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시를 짓고 노는 풍경은 워낙 장관이라, 한양의 아름다운 8가지 풍경 중 하나인 ‘필운대풍정’이라 불렀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인 겸재 정선은 필운대와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하는 사람들의 풍경을 ‘필운대’ ‘필운상화’라는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겸재 정선의 '필운대'입니다.
조선 시대 세심대 일대를 그린 평면도입니다. 왼쪽 위에 솟은 두 개의 암벽이 세심대로 추정돼요.

정조가 즐겨 찾은 꽃놀이 명소는?

북악산의 암벽 세심대(지금의 종로구 신교동)도 꽃놀이 명소였습니다. 1791년 3월 17일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세심대에 행차해서 꽃구경을 했어요. 바로 근처에 할머니 영빈 이씨에게 제사를 지내던 선희궁이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수많은 신하가 따라와 큰 잔치를 벌여 함께 시를 짓고 음악도 연주했기 때문에 한양 백성들이 구경 왔다고 합니다.

이날 정조의 꽃구경에 참여해 왕의 명령으로 시를 받아 적은 사람이 바로 다산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이날의 추억을 늙어서까지 간직했다고 하죠. 정조는 다음 해에도 세심대로 꽃구경을 나와 화전도 부쳐 먹고, 신하들과 활을 쏘며 놀았다고 합니다. 너무 즐거워서 떠나기 아쉬워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또 다른 꽃놀이 명소는 창덕궁 후원(궁궐 뒤에 만든 정원)의 정자 부용정이었습니다. 봄이 되면 이 정원에는 갖가지 꽃이 피었고, 왕은 자신이 아끼는 신하들을 불러다가 꽃놀이를 함께했다고 합니다. 정조 시대의 학자인 유득공도 참석해 창덕궁 후원 연못에서 낚시를 했다고 합니다. 또 연못에 띄운 비단 돛을 단 배를 타고 시를 짓기도 했죠. 정조는 아끼는 신하들에게 술을 선물했고, 왕과 신하가 즐겁게 꽃놀이를 했습니다.

창덕궁 후원 연못가에 있는 정자인 부용정입니다.

꽃놀이와 술

옛사람들은 꽃구경을 하며 무엇을 했을까요? 술을 마셨다고 해요. 조선의 시인 정철의 시조 ‘장진주사’를 보면 ‘꽃을 꺾어 세며 끝없이 술을 마시자’는 내용이 나옵니다. 꽃을 보며 준비해온 술을 마시기도 하고, 꽃을 재료로 써서 술을 담그기도 했습니다. 특히 진달래꽃으로 담근 술을 ‘두견주’라고 불렀어요.

아예 꽃으로 음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전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먹는 화전은 찹쌀 반죽을 동그랗게 부치고 그 위에 꽃을 올린 것인데요. 옛사람들의 화전은 조금 달랐습니다. 진달래꽃이나 장미, 국화 등을 쌀가루와 버무린 뒤 꿀과 밤을 소로 넣어 기름에 부쳐먹었죠.

꽃놀이와 술 이야기에 대해, 조선 시대 수학책인 ‘주서관견’에서는 흥미로운 문제가 하나 나옵니다. ‘지금 사람들이 술을 가지고 꽃놀이를 하러 가고 있다. 그런데 술을 추가해 원래 가지고 갔던 양의 2배인 3두 4승을 마셨다. 원래 술을 얼마나 가져갔는가?’ 두와 승은 곡식이나 술을 잴 때 쓰던 부피 단위로 1두는 10승입니다. 그만큼 꽃놀이에는 술이 빠질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여성들도 꽃놀이를 즐겼습니다. 1778년, 정조는 궁녀들이 꽃놀이 등을 위해 궁궐 바깥으로 놀러 나가는 것을 금지했어요. 조선 시대 궁녀들은 늘 궁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 휴가를 받을 수도 있었는데요. 일부 궁녀가 꽃놀이를 명목으로 밖에 나가 기생을 불러 잔치를 열고, 하인을 거느린 채 돌아다니거나 다른 사람의 정자와 별장에 함부로 드나드는 등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이런 풍습이 나라의 법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본 것이죠.

장독대에 두견주를 담그는 장면입니다. 진달래꽃을 두견화라고도 불러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간송미술관·국립고궁박물관·국가유산청

가을엔 국화꽃놀이

이렇듯 꽃놀이는 남녀를 불문하고 옛날 사람들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하지만 꽃은 언젠가 지기 마련이지요. 조선 전기의 문신 강희맹은 그의 시 ‘기경무’에서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봄바람이 궂어서 / 별안간 온갖 꽃송이를 다 쓸어내어 / 사람들이 꽃놀이 못 한 것을 슬퍼하네.’

다행히 봄꽃이 진다고 슬픔이 영영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가을에는 국화꽃을 보기 위해 다시 산에 올랐기 때문이죠. 중양절(음력 9월 9일)이 되면 국화꽃을 따서 술잔에 띄워 국화 향을 즐겼고, 국화꽃으로 술을 담그기도 했죠. 고려 말에는 정몽주나 정도전, 이숭인 같은 당대 인재들이 모여 국화 향기와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우리들이 신선이구나!” 하며 즐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인간사의 고뇌를 잠시 잊게 해주는 꽃의 힘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