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는 ‘천인감응’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하늘과 인간이 서로 반응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뜻인데요. 옛사람은 존경받던 왕이 죽거나 왕이 억울하게 죽으면 하늘에서 비를 내렸다고 믿었습니다.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때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들었어요. 기우제를 지내는 등 여러 방법을 썼으나 비는 좀처럼 내리지 않았고, 백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당시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유언으로 “내가 죽어 하늘에 빌어 비가 오게 하리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태종이 죽던 날인 1422년 음력 5월 10일, 정말 비가 내렸고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우’라 불렀습니다.
하늘이 죽은 왕의 슬픔을 알아주고 비를 내렸다는 ‘단종우’도 있습니다. 조선 6대 왕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강원 영월로 유배 간 뒤 1457년 음력 10월 24일 16세 나이로 죽었어요. 이날 영월에 비가 내렸고, 영월 사람들은 이 비를 단종우라 불렀답니다.
제주에는 ‘광해우’가 있어요. 조선 15대 왕 광해군 때, 쿠데타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조카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추대했어요.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이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됐다가 1641년 음력 7월 1일에 죽었습니다. 이날 비가 내렸고, 제주 사람들은 이 비를 광해우라 불렀죠.
그런데 인조반정이 일어난 명분 중 하나는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것이었어요. 조선 14대 왕 선조의 적장자(본처의 맏아들)였던 영창대군은 1614년 음력 2월 10일 유배지에서 사망합니다. 강화 부사(최고 지방관)가 영창대군의 집에 온돌을 세게 때고 음식도 막은 것으로 전해져요. 영창대군이 죽은 날에도 비가 내렸는데, 이 비는 ‘살창우’라고 불렸습니다. 영창대군을 죽인 날 내린 비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 날짜에는 각 지역에 정말 비슷한 기간 다른 날보다 비가 많이 왔을까요? 최근 65년(영월은 31년) 동안의 자료를 확인해보니, 왕이 죽은 날 비가 상대적으로 자주 내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태종우 날(음력 5월 10일)에는 서울에 65년 동안 총 39일 비가 내려, 평년 6월 평균 강수 일수(10일)의 약 1.8배였어요. 단종우(음력 10월 24일)의 경우 영월에 31년 중 10일 비가 내려 평년 11월 평균(6.6일)의 약 1.6배였고, 광해우(음력 7월 1일)는 제주에 65년 중 48일 비가 내려 평년 8월 평균(15.5일)의 약 1.6배였죠. 살창우(음력 2월 10일) 날도 강화에 65년 중 32일 비가 내려 평년 3월 평균(6.4일)의 약 2.3배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곧바로 ‘왕의 죽음 때문에 비가 내렸다’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부분 비가 잦은 계절과 겹치기 때문이에요. 태종우가 내린 음력 5월은 장마가 시작되는 시기이고, 광해우가 내린 음력 7월은 장마가 한창인 데다가 소나기도 자주 내리는 때입니다. 단종이 죽은 음력 10월 역시 가을 저기압의 영향을 받아 비가 내리는 날이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