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미술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에 나라나 도시 이름이 붙지 않고 오직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건 영국 런던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 한 곳뿐이에요. 다른 곳들은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나 싱가포르의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처럼 모두 뒤에 다른 말을 덧붙이거든요.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는 이름부터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나요?
영국 최초의 국립미술관
내셔널 갤러리는 영국 최초의 국립미술관이에요. 왕실이나 귀족의 개인 소장품으로 시작된 유럽의 여느 국립 미술관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국가가 주도해 만들었어요. 1824년 영국 정부가 존 줄리어스 앵거스틴이라는 은행가가 모아둔 명화 38점을 사들인 게 시작이었죠. 이후 1838년 왕실 마구간이 있던 트래펄가 광장에 미술관 건물이 세워졌어요. 시간이 흐르며 작품이 더해지고 전 세계에서 관람객이 몰려들자 건물이 확장돼 지금의 거대한 모습을 갖추게 됐답니다.
미술관 외관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닮았는데요. 내셔널 갤러리는 웅장한 모습이지만 처음부터 ‘모두를 위한 미술관’을 추구했어요. 신분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누구나 예술을 통해 교양을 쌓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연휴 3일과 새해 첫날만 빼고, 누구나 무료로 방문할 수 있답니다.
전쟁 속에서 이어진 예술의 힘
내셔널 갤러리의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끔찍한 전쟁 속에서 탄생했어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하늘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검게 얼룩졌어요. 약 260일 동안 71회의 끔찍한 대형 폭격이 쏟아졌고, 민간인 사망자만 4만명이 넘었죠. 트래펄가 광장에 우뚝 서 있던 내셔널 갤러리 역시 아홉 번이나 폭탄을 맞아 유리 천장이 깨지고 건물 곳곳이 부서지고 말았어요. 결국 미술관은 잠시 문을 닫았고, 명화들은 웨일스 북부의 석탄 광산으로 비밀리에 옮겨졌답니다.
명화가 떠나고 텅 비어버린 캄캄한 미술관의 빈자리를 채운 건 런던의 예술가들이었어요.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를 비롯한 음악가들이 매일 낮 미술관에서 ‘런치 타임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거든요.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덜덜 떨던 시민들을 음악으로 위로해주기 위해서였죠. 이 콘서트가 큰 호응을 얻자, 당시 미술관을 이끌던 케네스 클라크 관장은 젊은 미술가들을 초대해 현대 미술 전시도 열었어요. 전쟁 속에서 예술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 것이죠.
콘서트와 현대 미술이 위안이 되긴 했지만, 런던 시민들은 여전히 이곳에 있던 명화를 그리워했어요. 하지만 폭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런던 한복판으로 광산에 숨겨둔 그림을 전부 가져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죠. 이때 클라크 관장이 묘안을 냅니다. 매달 딱 한 점의 그림만 런던으로 가져와 전시하는 일명 ‘이달의 그림’ 프로젝트였어요. 밤에는 혹시 모를 공습을 피해 지하 방공호에 숨겨두고, 낮에만 미술관 벽에 조심스레 걸어두었죠.
그때 광산에서 돌아와 전시된 그림 중 하나가 바로 16세기 이탈리아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나를 만지지 마라’예요.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가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난 경이로운 순간을 담고 있죠. 그림 속 예수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려는 마리아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지만, 그의 상체와 따뜻한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어요.
절망 속 한 줄기 희망이었던 런치 타임 콘서트와 한 작품 전시회는 오늘날까지도 ‘피아노 데이’ 공연과 ‘이달의 그림’ 전시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요.
모두를 품는 미술관
오늘날 내셔널 갤러리는 13세기부터 20세기 중반의 유럽 명화 약 2600점을 소장하고 있어요. 특히 설립 초기부터 열정적으로 수집한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과 플랑드르 지역의 회화 컬렉션은 세계 최고로 꼽힌답니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에요. 이탈리아 상인 부부의 결혼 서약 장면을 그린 이 작품에는 충직함을 뜻하는 강아지, 부유함을 상징하는 모피 장식 코트와 실내 장식, 화가의 모습이 비친 벽면의 볼록거울 등 온갖 상징이 숨어 있어서,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듯한 재미를 준답니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도 인기 만점인 소장품이에요. 두 명의 멋진 외교관 발밑에 길쭉하고 이상한 얼룩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의 오른쪽 끝에서 비스듬히 쳐다보면 그것이 끔찍한 해골이라는 걸 알게 돼요. 이 밖에도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반 고흐의 ‘해바라기’ 등 미술 교과서에서 보던 명작들이 많답니다.
내셔널 갤러리가 위대한 이유는 비싸고 좋은 그림을 벽에 걸어두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어로 진행되는 맞춤형 설명, 시각장애인도 질감과 소리를 통해 그림을 느껴볼 수 있는 감상 프로그램 등을 모두 무료로 운영하고 있어요. 나이, 성별, 장애 유무와 관련 없이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예술을 누릴 수 있는 곳. 이것이 바로 내셔널 갤러리가 200년 넘게 트래펄가 광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유이자, 우리 모두가 이 미술관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