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가 지난 12일 베이징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어요. 양회는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국정 자문 기구 격인 정치협상회의(정협)를 가리킵니다. 매년 봄 열리는데, 여기서 중국의 주요 정책 방향을 논의하고 결정합니다. 올해 양회에선 인공지능(AI)과 첨단 산업 육성, 지역 균형 발전, 민생 안정 등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고 해요.

오늘은 양회 중에서도 전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정협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정협은 중국 현대사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성격이 바뀌었어요. 건국 초기에는 임시 의회로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역할을 했지만, 한때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국가 정책에 대해 자문하고 사회 각계의 의견을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지난 11일(현지 시각) 중국 베이징에서 정치협상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에요. /신화 연합뉴스

국명·수도·국가·국기까지 결정

정협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1949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전체 회의였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요. 회의가 열릴 땐 공산당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돼 새로운 국가를 계획해야 하는 단계였어요. 아직 헌법도 없었고 의회도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협이 국가의 기초를 결정하는 임시 의회의 역할을 한 거죠.

정협 첫 회의에서 오늘날 중국의 많은 구성 요소가 결정됐습니다. 나라 이름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정했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했으며, 국가(國歌)도 의용군 행진곡으로 채택했어요.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지 기본 원칙을 담은 ‘공동 강령’도 이 회의에서 정했습니다. 이는 정식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임시 헌법 역할을 했지요.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선출하기도 했답니다.

중국 국기 ‘오성홍기’도 이 회의에서 채택됐어요. 당시 새로 출범하는 국가의 상징을 정하기 위해 전국에서 국기 디자인 공모가 이뤄졌어요. 조건은 중국의 지리·역사·민족적 특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과, 붉은색을 사용해야 한다는 거였죠. 이 공모에 무려 3000개의 디자인이 제출됐답니다.

오성홍기는 경제학자 쩡롄쑹이 제출한 디자인이었습니다. 붉은 바탕에 큰 별 하나와 작은 별 네 개가 그려져 있는데요. 큰 별은 공산당을, 작은 별 네 개는 노동자·농민·소자산 계급·민족 자산 계급을 상징해요. 붉은색은 혁명을, 노란색은 광명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건국 직전 정협이 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사실은 당시 정협의 정치적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줍니다.

1949년 제1차 정협 전체 회의예요. 이 회의에서 중국의 국명과 수도, 국가, 국기, 공동 강령 등이 정해졌습니다.

다양한 세력 포괄하는 ‘통일 전선’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시기 첫 회의가 열렸지만, 초기부터 정협은 공산당만의 기관이 아니었어요. 공산당은 내전 직후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치 세력을 포괄하는 ‘통일 전선’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정협에도 공산당뿐 아니라 민주당파(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며 국민당에 반대한 8개 정당), 사회 단체, 문화계 인사들까지 참여했어요.

내전에 패한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국민당 출신 중 중국에 남은 일부도 정협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정협 지도부였던 쑹칭링이에요. 쑹칭링은 국민당 창립자였던 쑨원의 부인입니다. 쑹칭링이 정협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새 중국 정부가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는 연합 정부임을 증명한 것이죠.

이후 1954년까지 정협은 중국의 입법부 역할을 했어요. 이 기간에 법률 3500여 건을 제정하며 새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답니다. 그러다 1954년 중국이 새 헌법을 제정하고 전인대를 국가 최고 권력 기관으로 규정하면서 정협의 역할이 크게 축소됐어요. 전인대가 등장하면서 입법 기능이 사라지고 자문 기관이 된 것이지요.

쑹칭링(왼쪽)과 쑨원의 결혼 사진이에요(왼쪽). 1950년 촬영된 마오쩌둥 사진 /위키피디아

정협의 위기와 극복

정협은 문화대혁명(1966~1976) 때 큰 위기를 맞습니다. 문화대혁명이란 마오쩌둥이 주도해 극단적으로 공산주의만을 수호하며 지식인 등을 공격한 정치 운동입니다. 이때 중국 정치·사회·문화의 질서가 크게 흔들렸지요. 마오쩌둥을 따르던 학생들로 이뤄진 홍위병은 지식인들을 ‘부르주아’ ‘수정주의자(기존 사상을 변질하는 행위를 한 사람)’로 몰며 공격했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정협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민주당파 인사들도 공격 대상이 돼 숙청되거나 활동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 정협의 기능은 사실상 마비됐으며 회의도 거의 열리지 않았습니다. 형식적으로만 존재했을 뿐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어요.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화대혁명도 막을 내리게 되고, 당시 공산당 지도부 핵심 인물이었던 덩샤오핑이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가 됩니다. 덩샤오핑은 1978년 중국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시장 경제를 일부 도입하고 외국과 교류를 확대하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정협이 다시 주목받게 됩니다.

덩샤오핑은 경제 발전을 위해 전문가와 지식인뿐 아니라 기업가나 화교(외국에 사는 중국인) 등 다양한 집단을 정치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이 과정에서 정협이 다시 활성화됐고, 경제·과학·문화 분야 인사까지 참여하는 정책 자문 기구로 자리 잡았어요. 기업가나 문화계 인사들이 정협 위원으로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요. 영화배우 성룡도 한때 위원이었고 농구 선수 출신 야오밍은 지금도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