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지음 l 오진숙 옮김 l 출판사 솔 l 가격 1만2000원
가만히 앉아 조용히 하루를 돌아보려는데 불쑥 휴대전화가 울린 적 있으신가요? 나만의 고요한 시간은 감쪽같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바로 이 ‘방해 받는 순간들’에서 출발합니다. 왜 누군가는 마음껏 사유할 수 있고 누군가는 자꾸만 그 기회를 빼앗기는지 묻습니다.
1928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강연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고상한 문학 이야기 대신 남녀 단과대학(college)의 식사를 비교한 경험부터 털어놓습니다. 당시 영국 대학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단과대학에 속한 경우가 많았고, 학생 대부분은 기숙하며 공부했죠. 남성 단과대학 식탁에는 최고급 쇠고기와 훌륭한 포도주가 넘쳐났지만, 여성 단과대학 식탁에는 묽은 수프와 물, 말린 자두가 전부였죠. 저자는 이 차이를 통해 위대한 사유를 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자원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작가 셰익스피어에게 그와 똑같이 천재적인 여동생 ‘주디스’가 있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디스도 오빠처럼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오빠 셰익스피어가 런던에서 성공할 때, 주디스는 책을 펴기만 해도 꾸지람을 들었을 겁니다. 이처럼 역사상 위대한 여성 작가가 드문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재능이 자랄 토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주장합니다.
문학사에서 아주 유명한 문장이 여기서 탄생합니다.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연 500파운드의 돈과 자물쇠가 달린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방’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생계가 불안하지 않을 정도의 경제적인 독립과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사유할 수 있는 지적인 자유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죠.
또한 저자는 문학 속 여성과 현실 속 여성의 괴리를 꼬집습니다. 문학 속 여성은 왕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치명적인 캐릭터이지만, 현실에서는 재산도 교육도 없이 누군가의 소유물로 취급받곤 했습니다. 저자는 이 틈새를 파고들며 남이 만든 환상이 아니라 진짜 경험을 스스로 써 내려가야 한다고 여성들에게 당부합니다. 저자의 당찬 선언은 문학의 지평마저 넓혔습니다. 여러 작가에게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감정도 문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죠.
오늘날 우리 삶은 과거보다 풍요로워졌고, 눈에 띄는 차별도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결코 낡은 유물이 아닙니다. 현대인들 역시 ‘나’를 마주할 시간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성공을 보며 그 사람의 재능만을 칭송하지요. 하지만 이 책을 덮고 나면 그에게 자기 생각을 키울 만큼 넉넉한 시간과 공간이 있었는지도 살펴보게 됩니다.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내 안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속 작은 방 하나를 단단하게 지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