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순간을 기록한 미군 장교의 일기가 95만달러(약 14억원)에 경매에 나왔어요. 당시 26세였던 로버트 루이스 대위는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탑재한 B-29 폭격기 ‘이놀라 게이’의 부조종사였어요. 그는 원폭 투하 두 시간쯤 전 ‘폭탄이 바로 내 뒤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기묘한 기분’이라고 적었고, 원폭 투하 후에는 ‘결과를 보기 위해 기체를 돌렸고, 인간이 본 것 중 가장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고 기록했어요. 며칠 뒤에는 ‘우리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인가’라고 적으며 자책했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은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어요. 당시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독일·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한 상태였지만, 일본은 항복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걸까요? 미국은 많은 희생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왜 원자폭탄 투하라는 결정을 내렸을까요?
소련 견제한 미국, 원폭 사용을 결정하다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배경부터 살펴봐야 해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1년부터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어요. 엄청난 인명·자원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2차 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죠. 이 무기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적을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고 해요. 그렇게 1941년 1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맨해튼 프로젝트’로 불리는 원자폭탄 제조 사업을 극비리에 출범했습니다. 프로젝트에는 저명한 과학자들도 참여했죠.
그런데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던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어요. 이후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선 위원회를 만들어 원자폭탄이 완성되면 어떻게 할지 등을 논의했어요. 당시 급부상하고 있던 소련의 위상이 위원회의 논의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대요. 미국은 원자폭탄 제조 관련 기술을 독점하면, 전쟁 후 세계 질서를 재편할 때 소련을 압도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얻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죠. 결국 위원회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이 완성되는 즉시 사용하기로 결정했답니다.
미국의 세 가지 선택지
미국이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데는 일본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도 영향을 줬습니다. 전쟁이 장기화하는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미국 내부에서도 커지고 있었거든요.
일본은 자결, 옥쇄(명예나 충절을 위해 죽는 것), 만세 돌격(만세를 외치며 죽는 것)과 같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저항하면서 미국을 놀라게 했죠. 1944년 말 사이판 전역 전투에서 일본군 항복·부상자는 전체 병력의 1% 미만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자였다고 해요. 일본군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항복하는 것은 치욕스럽고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가르쳤죠.
미국은 일본을 외교적으로 압박해 조기에 항복하도록 강요하는 방안도 고려했어요. 특히 소련이 공식적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 궁지에 몰린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소련을 끌어들이면 소련의 위상이 커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어요. 미국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1945년 5월 독일이 먼저 항복한 뒤 미국에서는 일본과 평화 협상을 하자는 목소리도 나왔어요. 당시 미국은 지속적으로 일본 천황에 대한 처벌과 천황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이 경우 일본이 끝까지 저항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7월 미국·영국·중국 3국 정상회담을 위해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을 찾았다가, 회담 직전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투하하기로 마음을 굳혔어요. 포츠담 회담에서도 ‘일본에 무조건 항복 요구’가 결정됐습니다.
원자폭탄 투하까지는 약 3주가 더 걸렸어요. 그동안 ‘일본에 무조건 항복 요구’ 조항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미국 정책 결정권자들 사이에서 계속 나왔는데요. 미국 군부는 이 조항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강력 반발했어요. 미군의 인명 피해가 많이 발생한 상황에서 기존의 전쟁 목표를 수정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원폭 사망자 수십만 명
이때 과학자들은 아무런 경고 없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데 반대하는 청원서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했어요. 폭탄 투하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고 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세계 지배 구조에서 미국이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점,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내에서 반일(反日) 감정이 상당히 높았기에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 등이 있어요. 실제로 1944년 12월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 인구의 13%가 일본인 전체를 몰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그렇다면 일본이 이토록 끝까지 버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은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천황은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상징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시 중심부 580m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했어요. 며칠 뒤인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에만 히로시마에서는 약 10만명, 나가사키에서는 약 7만4800명이 사망했어요.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미국은 일본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천황제를 유지하는 대신 천황의 정치 권한을 크게 줄이는 방식을 택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일본 천황은 상징적인 국가 원수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