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 지음 l 이봉지 옮김 l 출판사 열린책들 l 가격 1만2800원
“아프니까 청춘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한때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이 말들은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막상 감당하기 힘든 불행이 닥쳤을 땐 공허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고를 당하거나 억울한 일에 휘말렸을 때 “이 고통도 다 큰 뜻이 있어서 주어지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기만처럼 들릴 테니까요. 18세기 프랑스의 지성 볼테르가 쓴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이러한 근거 없는 낙관을 산산조각 내기 위해 쓰인 책입니다.
이 책은 일종의 ‘로드무비(주인공이 이동하는 경로를 쫓아가면서 진행되는 영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주인공 캉디드는 독일의 한 성에서 가정교사 팡글로스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랍니다. 팡글로스는 “이 세상은 신이 만든 최선의 세계이며, 모든 일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철학자입니다. “코가 튀어나온 것은 안경을 걸치기 위해서고, 다리가 있는 것은 바지를 입기 위해서”라는 식이죠. 캉디드는 이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세상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작 여동생의 혼외자였던 캉디드는 남작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가 성에서 쫓겨나고 말아요. 그 순간 ‘최선의 세계’라는 환상은 처참하게 깨집니다. 캉디드가 마주한 현실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군대에 끌려가 죽도록 매질을 당하고, 전쟁터에서 수만 명이 참혹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가 도착한 리스본에서는 대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종교재판관들은 “신의 노여움을 풀겠다”며 무고한 사람들을 산 채로 불태웁니다.
벼랑 끝에 내몰리는 캉디드를 보면서도 스승 팡글로스는 계속해서 “비극도 거대한 선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합니다. 독자들은 이런 부조화를 보며 눈앞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한 채 “다 잘될 거야”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책임한 태도인지 깨닫습니다.
그렇다고 볼테르가 세상을 비관하고 체념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고 늙고 지친 캉디드는 튀르키예의 작은 농가에 정착합니다. 여전히 팡글로스는 “네가 온갖 고생을 한 덕분에 지금 여기서 맛있는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캉디드는 이 유명한 마지막 대사로 그의 입을 다물게 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
이 말의 핵심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들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작은 확실함’을 챙기자는 것입니다. 입시나 진로, 불투명한 미래를 생각하면 누구나 막막하고 불안해집니다. 침대에 누워 걱정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무기력해지죠. 내 힘으론 세상의 시스템이나 미래의 결과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볼테르가 제안하는 ‘정원 가꾸기’는 마음의 피난처가 돼줍니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고, 당장 내 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집중해보자는 겁니다.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하거나, 산책을 하며 땀을 흘리거나, 오늘 풀어야 할 문제집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행동들 말이에요.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내 발밑을 단단히 딛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가꿀 수 있는 ‘나만의 작은 정원’은 무엇인가요? 그 작은 성취감들이 모여 비로소 우리를 이 불안한 세상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