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 때문에 시작된 이란의 반(反)정부 시위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어요. 이란 화폐인 리알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오르면서 생활고에 시달린 국민이 거리로 나온 겁니다. 이 과정에서 이란 정부가 시위를 강경 진압해 수천~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비 왕조의 레자 팔레비 왕세자는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 이란 정권을 비판했어요. 그는 미국에 망명한 상태입니다. 레자 팔레비는 “팔레비 왕조가 무너질 당시만 해도 이란의 GDP(국내총생산)는 한국의 5배였지만, 지금 이란은 북한처럼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팔레비 왕조가 20세기 초 등장한 이후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중동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해 있었답니다. 현재 일부 시위대는 ‘왕정복고(폐지된 왕정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외치고 있다고 해요. 이란 근대화를 이룬 팔레비 왕조는 어쩌다 몰락한 걸까요?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다
1925년 등장한 팔레비 왕조는 이슬람 혁명으로 1979년 몰락할 때까지 2명의 ‘샤(왕)’가 50여 년 동안 이란을 통치했습니다. 팔레비 왕조 이전 20세기 초 이란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폭정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제1차 세계대전, 기근 등으로 붕괴 직전이었어요. 당시 카자르 왕조의 아흐마드 샤는 이런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죠.
이때 기회를 엿보던 사람이 바로 팔레비 왕조를 세운 레자 칸이었습니다. 1921년 2월 그는 근대식 군대를 이끌고 테헤란에 무혈(無血) 입성합니다. 당시 이란 국민은 새 지도자의 등장으로 무능한 기존 왕조가 끝났다고 생각해 쿠데타를 오히려 환영했다고 해요.
레자 칸은 군대 지휘권을 장악한 후 전쟁부 장관, 총리를 거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갔어요. 결국 1925년 이란 의회는 카자르 왕조의 아흐마드 샤를 폐위하고 레자 칸을 새 샤로 선출합니다. 레자 샤의 팔레비 왕조가 시작된 것이죠.
팔레비 왕조 창건자의 몰락
레자 샤는 즉위 후 나라의 공식 명칭을 서구식 이름인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며 민족 정체성을 강조했답니다. 이슬람 성직자를 구시대의 잔재로 보고, 이슬람 율법학자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정책도 실시합니다. 이슬람 종교 학교에 대한 지원도 중단됐어요.
이 시기 이란 여성의 지위도 상승했는데요. 레자 샤는 1936년 히잡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남녀 모두 다닐 수 있는 학교도 늘렸어요. 그러나 선택적 근대화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노동조합과 정당을 금지했고, 언론을 강력하게 탄압했기 때문이죠.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레자 샤는 이란에서 소련과 영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나치 독일과 교역을 늘렸습니다. 이는 1941년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점령하는 구실이 됐어요. 당시 미국·영국·소련 등이 속한 연합국이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죠. 연합국은 이란을 거쳐 인도에서 소련으로 전쟁 물자를 이송하기 위해 레자 샤를 퇴위시켰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레자 샤를 왕위에 앉혔습니다. 무함마드 레자 샤는 나이도 어리고 정치 경험도 없어 연합국이 관리하기 쉬운 인물이었거든요. 퇴위당한 아버지 레자 샤는 망명 생활을 하다 194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망했습니다.
스쳐간 이란의 자유
1940년대 후반부터 1953년까지는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로 평가받아요. 공산주의부터 민족주의까지 다양한 정당이 등장해 경쟁했고, 언론도 활성화됐습니다. 이 가운데 민족주의자인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1951년 총리로 취임했어요.
모사데크는 오랜 기간 영국 등 외국에 착취당한 이란의 천연자원을 되찾고자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습니다. 영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죠. 공산주의가 이란에 침투할 것을 우려하던 미국과 손잡고 모사데크를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추진합니다. 결국 1953년 모사데크는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은 세력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어요.
팔레비 왕조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를 막는 전투 기지가 됐습니다. 미국은 이란에 대규모 군사 원조를 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이란 내 인물들을 감시하는 비밀 경찰인 사바크(SAVAK)도 만들어졌어요. 사바크는 팔레비 왕조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공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혁명 이후 반복된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 사그라들지 않자, 연합국이 앉혀준 왕인 무함마드 레자 샤는 1960년대 의회를 해산합니다. 여성의 참정권 확대와 토지 재분배 등을 포함하는 서구화 정책인 ‘백색 혁명’도 펼쳐요. 이로 인해 이슬람과 민족주의 세력의 불만은 커졌습니다. 특히 이슬람 종파 중 하나인 시아파 지도자들이 여성 자유화 법률이 이슬람 가치에 어긋난다며 서구화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훗날 이슬람 혁명을 이끈 루홀라 호메이니도 이 중 한 명이었죠.
1970년대 이란이 세계 최대의 석유 수출국이 되면서 도시화와 산업화가 빨라졌지만, 사회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어요. 전통적 윤리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고, 경제 성장의 성과가 소수 고위층에만 집중돼 빈부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죠.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한 대중은 1978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혁명이 격화되자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는 해외로 망명했고, 혁명을 이끌었던 루홀라 호메이니는 성직자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세웠어요. 이란은 ‘라흐바르’라는 종교적 권위자가 최고 지도자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돼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팔레비 왕조의 독재를 끝내고 등장했지만 또 다른 독재 국가가 됐어요. 라흐바르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권력은 정치, 사법, 군사권까지 장악해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기 때문이죠. 새로운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와 달리, 시위를 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면 체포뿐 아니라 징역이나 사형까지 선고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여성들은 다시 의무적으로 히잡을 써야 했어요. 히잡과 순결법을 만들어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에게 최대 10년 징역형을 내릴 수 있게 됐죠. 여성 차별, 정치적 탄압, 경제 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이란 사회는 여전히 권위주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