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난 3일(현지 시각) 군사 작전을 통해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체포해 미국으로 압송했어요. 트럼프 행정부는 체포 전부터 다방면으로 베네수엘라를 강하게 압박해 왔었죠. 베네수엘라는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나라로, 세계 1위 석유 매장량으로 유명해요. 하지만 현재는 심각한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정을 겪고 있습니다. 국민 수백만 명이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 인근 칠레·콜롬비아 등으로 향하고 있으며, 마약 및 범죄 조직이 활개 치고 있어요.

베네수엘라의 정식 국가 명칭은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입니다. 베네수엘라에 가면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시몬 볼리바르 대학교와 같이 ‘볼리바르’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심지어 화폐 단위도 볼리바르예요. 볼리바르는 바로 과거 베네수엘라를 스페인 식민지에서 해방시킨 인물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라틴아메리카에서 볼리바르를 국부(國父)로 꼽는 나라는 베네수엘라뿐만이 아니에요. 볼리비아는 나라 이름 자체가 ‘볼리바르의 땅’을 뜻하죠. 에콰도르,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에서도 볼리바르는 국부로 칭송받고 있어요.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를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준 해방자였기 때문이죠. 오늘은 시몬 볼리바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독립군과 스페인군이 맞붙은 전투 그림. 이후 베네수엘라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베네수엘라 화가 안토니오 에레라 토로의 1889년 작품 '볼리바르의 죽음'입니다. 볼리바르는 사망 이후에도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어요.

유럽 귀족 가문 출신의 독립운동가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베네수엘라는 스페인 식민지였죠. 볼리바르의 선조는 스페인 출신이었는데 베네수엘라로 건너와 정착했어요. 볼리바르도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죠.

어릴 적 부모님을 잃은 볼리바르는 할아버지와 외삼촌 밑에서 자랐어요. 특히 그를 교육했던 가정교사 시몬 로드리게스는 장자크 루소의 열렬한 추종자였는데요. 볼리바르는 로드리게스에게 루소가 주장한 자유와 정의, 기본권에 대해 배웠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망한 후 볼리바르는 학업을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갔어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던 그는 스페인 귀족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아내 마리아 테레사도 이때 만났습니다.

볼리바르와 테레사는 스페인에서 결혼한 뒤 베네수엘라로 함께 돌아왔어요. 이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꿨지만 테레사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죽고 맙니다. 절망에 빠진 볼리바르는 다시 유럽으로 떠났죠. 방황하던 그를 붙잡아 준 사람은 어린 시절의 가정교사 로드리게스였습니다. 그는 볼리바르가 루소,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의 저서를 읽도록 하며 볼리바르를 철학과 정치의 세계로 끌어들였어요.

그란 콜롬비아의 탄생

볼리바르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 정신에 빠져들며,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라는 꿈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속에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 정신을 배신하고 독재자가 됐다고 생각하며 크게 실망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라틴아메리카도 미국처럼 여러 주·나라가 합쳐진 ‘합중국’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베네수엘라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독립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때마침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해 정권이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이 됐죠. 볼리바르에게 이는 기회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독립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1811년 베네수엘라는 스페인의 혼란을 틈타 독립을 선포했으나, 스페인군과 전투에서 패하며 1812년 다시 식민지 상태로 돌아갔어요. 1813년 베네수엘라는 6번의 격전 끝에 스페인군을 무찌르고 수도를 되찾았지만, 1814년 다시 쳐들어온 스페인군에 패했죠. 볼리바르는 자메이카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어요.

볼리바르의 초상화예요. 베네수엘라 화가 아르투로 미첼레나가 1895년 그렸습니다.
볼리바르의 초상이 그려진 베네수엘라의 화폐 '볼리바르' 앞면. /위키피디아·AFP 연합뉴스

실패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도 볼리바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투쟁해서 독립할 것인지, 어떤 나라를 세워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그리고 독립을 위해 스페인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장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또 다른 스페인 식민지였던 콜롬비아를 먼저 독립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어요. 당시 스페인군이 베네수엘라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죠.

볼리바르의 군대는 스페인군을 기습해 콜롬비아 수도를 되찾은 뒤 마침내 1819년 8월 전투에서 승리했어요. 그리고 그해 12월 ‘그란 콜롬비아’를 선언했습니다. 그란 콜롬비아는 지금의 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파나마 지역을 포함하는 나라로, 볼리바르 주도로 여러 나라를 통합해 세운 합중국이었죠. 이후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 페루까지 차례로 스페인 식민지에서 해방시키며 그는 그란 콜롬비아와 페루의 국가 원수 자리에 오르게 됐어요. 페루는 그란 콜롬비아를 구성하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페루의 일부였던 ‘상 페루’는 볼리바르를 기리기 위해 볼리비아라는 나라를 세웠죠.

민중의 마음에 남은 해방자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가 합중국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랐어요. 라틴아메리카가 조각조각 갈라지면 유럽이 다시 노릴지도 모르고, 합중국인 미국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단결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란 콜롬비아가 합중국이어도 각 나라가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연방주의자와 합중국 자체를 반대한 분리주의자 사이 갈등으로 내전이 일어났어요. 볼리바르의 중재 노력도 소용없었죠. 심지어 일부 세력은 대통령궁을 습격해 볼리바르를 살해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볼리바르는 “나의 죽음이 동맹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무덤에 갈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 통합에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란 콜롬비아가 와해될 조짐을 보이고 허탈해진 볼리바르는 1830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어요. 그리고 그해 말, 지병이었던 결핵으로 결국 사망했습니다. 그가 사망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란 콜롬비아는 완전히 해체됐어요. 비록 그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아직까지도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