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지음 l 출판사 창비 l 가격 9000원
항상 가성비를 따지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인력거를 타면 “내가 무거워 봤자 얼마나 무겁냐”며 요금을 깎고, 버스비가 아까워 10리(약 4㎞)를 걸어 다닙니다. 여기까지는 동네에 한 명쯤 있을 법한 지독한 구두쇠 같지만, 이 할아버지의 계산법은 가족에게 더 섬뜩합니다. 그는 손자들을 자신의 노후 연금이자 가문의 안전을 위한 보험으로 여기죠. 오늘 소개할 책은 1930년대 가족마저 투자하듯 관리하려 했던 한 할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실패기입니다.
주인공 윤 영감에게 일제강점기는 내 돈을 안전하게 불려줄 최적의 투자 환경입니다. 든든한 일본 경찰이 자신의 금고를 지켜주니 이보다 완벽한 ‘태평천하’는 없다고 믿지요. 그는 이 태평성대를 영원히 누리기 위해 치밀한 가문 부흥 프로젝트를 가동합니다. 큰손자는 행정 권력을 쥔 군수로, 똑똑한 둘째 손자는 경찰서장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윤 영감이 대주는 손자들의 학비는 훗날 되돌려받을 투자금인 셈입니다.
하지만 노련한 투자자인 윤 영감도 간과한 치명적인 리스크가 있었으니,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윤 영감의 아들은 아버지의 금고를 털어 노름판을 전전하고, 군수가 될 줄 알았던 큰손자는 유흥에 빠져 할아버지의 재산을 공중분해시킵니다. 자신의 돈을 갉아먹는 도둑을 집 안에서 키우고 있었던 셈이죠. 그는 밤마다 주판을 튕겼지만, 정작 돈으로만 통제된 가족들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존경 대신 경멸과 탐욕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계산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대망의 결말, 윤 영감에게 투자 실패를 알리는 결정적인 청구서가 날아듭니다. 가문의 희망이었던 둘째 손자 ‘종학’이 체포됐다는 소식입니다. 할아버지가 찬양하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손자가 반기를 든 것이었죠. 평생을 공들인 가문 부흥 프로젝트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윤 영감은 바닥을 치며 울부짖습니다. “이 태평천하에! 이 태평천하에… 그놈이 세상 망쳐 놀 불한당패(불량배)에 참섭(끼어들어 간섭)을 해? 죽일 놈! 죽일 놈!”
소설은 윤 영감의 처절한 비명으로 끝납니다. 작가 채만식은 왜 이런 결말을 보여줬을까요? 윤 영감은 평생 손해 보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어요. 하지만 돈으로 사람을 통제하고 역사와 정의를 외면한 채 오직 이익만 챙기려던 그의 계산은 결국 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 책은 가성비와 스펙이 중요해진 오늘날 우리에게도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 안간힘을 쓰고, 좋은 직업이 성공한 인생이라 믿는 현대인의 모습은 윤 영감의 가문 부흥 프로젝트와 얼마나 다를까요? 인생의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려고만 할 때 우리가 놓치게 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가장 똑똑한 척했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계산을 했던 윤 영감의 일그러진 얼굴. 그 모습이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그와 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