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한 해가 다하고, 내일부터는 새해로구나. 세월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구나.’ 조선 효종의 장인이었던 장유가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에 지은 시의 첫머리입니다.

비록 하루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가지만,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해가 시작될 때면 여러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부풀어 공부나 운동 계획 등을 야심차게 세우는 분들도 있고, ‘벌써 한 살 더 먹었나?’하며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죠. 오늘은 새해를 맞아 조선 시대 사람들은 설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시대 ‘용호문배도’의 일부. 문배도는 문에 붙이는 그림을 가리키는 말로 세화의 일종입니다. 옛사람들은 호랑이가 재앙을 물리쳐 준다고 믿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조선 시대에는 새해 정월 초하루(음력 1월 1일)가 되면, 왕과 신하들이 함께 궁궐에 모여 신년 하례(축하 예식)를 올렸습니다. 백성들은 이웃과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는 설날을 맞이한 자기 집안 풍경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누이들은 떡 만들고 옷을 다리고, 형제들은 어머니께 절을 올리며, 아내는 친정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덕무도 잘 차려입고 곳곳의 친척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놀이도 하며 즐겁고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마시는 ‘도소주’

새해의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조선 시대의 특별한 설날 풍습으로는 ‘도소주’가 있습니다. 이것은 계피, 도라지, 방풍 등 갖은 약재를 넣어 담근 술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쯤까지만 해도 설날에 도소주를 마시기 위해 모이곤 했습니다.

벽에 복조리가 걸려 있는 모습. 조리는 좋은 쌀을 골라내는 도구예요. 새해 복을 조리로 골라내 얻는다는 뜻을 담아 벽에 걸었다고 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소주를 마시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고 해요.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한 방에 모여 어린 순서대로 도소주를 마시고 방에서 나갑니다. 젊은 사람은 한 해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마시고, 늙은 사람은 한 해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도소주를 마시면서 사람이 하나둘씩 줄다 보면 결국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만 남게 되겠죠. 어린 시절에는 재밌게 마시겠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차례가 늦어질수록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체감하게 됐다고 합니다. 유명한 유학자인 이수광과 정약용도 도소주를 마시며 나이 들어가는 것을 서러워하는 시를 짓곤 했죠.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는 그림

이제는 사라진 설날 풍습에는 ‘세화(歲畵)’도 있습니다. 세화는 새해 그림이라는 뜻으로, 재앙을 내쫓고 복을 부르며 사람을 오래 살게 해준다는 상징을 담고 있어요. 세화의 소재로 신선이 가장 사랑받았고, 기린이나 봉황, 호랑이 등도 그렸다고 합니다. 세화는 주로 임금이 만들어서 신하들에게 선물해 줬습니다. 세화는 고려 때부터 조선까지 널리 유행했습니다. 문에 주로 붙여 ‘문화’라고도 불렸다고 해요.

경기 용인시 한국민속촌의 한 전통 가옥 문에 붙어 있는 세화. 세화는 주로 문이나 벽에 붙였죠. /국립민속박물관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는 사민도(四民圖)를 궁궐 벽에 붙였는데, 이는 사농공상(선비·농민·공인·상민)이 일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습니다. 왜 이 그림을 벽에 붙였을까요? 정희왕후는 “온 세상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여기에서 나오니 세화로 써도 좋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조는 정희왕후의 현명함에 감탄해 신하들에게 자랑했다고 하죠.

세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 그림 담당 관청인 ‘도화서’에서 그린 왕실의 세화였습니다. 조선 최고 화가들 그림인 만큼, 해마다 수백 장이 제작되었고 이 때문에 낭비가 심해진다고 해서 여러 차례 제작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해가 되면 세화를 찾았습니다. 궁궐이 아닌 민가에서도 세화를 그려 붙이는 풍습이 유행한 것이죠. 백성들은 세화를 통해 새로운 한 해 동안 복을 빌고 잡귀를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문이나 벽 등에 복조리를 걸거나 남에게 불운을 팔아넘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모두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과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떡국의 옛 이름 ‘불탁’ ‘탕병’

설날 음식 하면 역시나 떡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조선 숙종 때 학자 송시열은 1660년 ‘백성들이 올겨울 눈보라에 얼어 죽지 않고 내년에 큰 사발의 떡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이라는 글을 왕에게 올렸습니다. 여기서 떡국은 한자로 ‘불탁(不托)’이라고 쓰는데, 수제비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겨울을 지내고 새해에 먹는 음식이라면 역시나 떡국이 떠오릅니다.

떡국. 조선 시대에는 떡국에 꿩, 닭, 쑥, 굴, 다슬기 등 다양한 재료를 넣어 먹었다고 해요. /한국관광공사

떡국은 ‘탕병(湯餠)’이라고도 했어요. 조선 후기 요리책인 ‘시의전서’에 따르면, 탕병은 얇게 썬 흰떡에 뜨거운 장국을 계속 부어 먹는 음식이죠. 이때 국물은 꿩고기를 넣어 끓였고, 꿩고기 산적을 고명으로 올려놓았습니다. 그 외에도 지역에 따라 닭, 쑥, 굴, 다슬기 등을 떡국에 넣어 먹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도 사랑받은 떡국

과거 떡국은 설날이 아닌 때에도 자주 만들어 먹었지만, 설날 떡국은 먹으면 나이를 함께 먹는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그래서 이덕무는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이를 더해주는 떡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떡국이 미워서 먹고 싶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철종 때의 인물인 서경순은 중국을 여행하다가 설날을 맞이했고, “떡국을 먹지 않았으니 나이를 먹지 않았다”고 우기기도 했습니다.

멀리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떡국은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음식이었습니다. 정조 때 인물 김정중은 설날을 중국에서 맞이하면서, 고향에서 떡국과 만두를 먹으며 온종일 놀던 기억을 되새기며 쓸쓸해했습니다.

기대도 걱정도 되는 새해를 맞아, 처음에 인용했던 장유의 시 마지막을 써보겠습니다. ‘나날이 새롭게 덕을 쌓는다면 나이를 먹는데도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아직 더 잘해 볼 수 있으니 이제부터 모쪼록 다시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