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파울러 지음 l 허형은 옮김 l 출판사 마농지 l 가격 2만5000원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많지요? 방주는 네모 모양 배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신이 세상을 뒤덮는 큰 홍수를 일으켜 인간에게 벌을 주지요. 노아는 홍수가 일어나기 전 미리 큰 방주를 만들어 온갖 동물을 싣고 홍수를 피합니다. 홍수가 끝난 뒤 동물들은 땅에 내려와 자손을 낳고 생명을 이어갑니다. 각종 식물의 씨앗을 보관하고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불려요. 북극과 가까운 노르웨이령 스발바르제도의 바위산 플라토베르게에 있습니다.

2008년 완공된 저장고는 해발 고도 약 130m 높이의 바위산에 있습니다. 영구 동토층(2년 이상 평균 온도가 0도 이하인 땅)에 수평으로 146m 길이 터널을 파고 끝 부분에 창고 3개를 만들었어요. 저장고에는 전 세계 1750개 종자은행(씨앗을 보관하는 시설)에서 보내온 100만 종 이상, 5억개 이상의 종자 표본이 보관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44종, 2만3185개 토종 종자를 맡겼습니다. 종자 소유권은 종자를 맡긴 기관에 있고, 원하면 언제든 다시 꺼낼 수 있습니다.

국제종자저장고는 왜 스발바르제도에 있을까요? 전쟁이나 테러, 자연 재난, 환경오염에서 먼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하 18도를 유지하는 냉각 장치가 고장 나도 영구 동토층이 천연 냉동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해도 높은 산에 자리 잡고 있어 끄떡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왜 이런 저장고가 필요할까요?

19세기 미국에서 재배된 콩 578종 가운데 20세기 말까지 남아 있던 것은 32종입니다. 같은 기간 양배추는 544종에서 28종으로, 당근은 287종에서 21종으로 줄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에 재배되던 토종 벼 5171종이 1993년 908종으로 줄었습니다. 개량을 하면서 많은 종자가 멸종됐습니다. 종자의 다양성이 줄어들수록 남은 종은 병충해나 기후 변화 등 충격에 약해지고 인류의 생존도 위협받게 되지요.

뜻하지 않은 사고나 질병에 대비해서 가입하는 보험은 보험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국제종자저장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자를 꺼낼 일이 없는 것이 좋지요. 시리아에 본부가 있는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는 2011년 국제종자저장고에 11만6000종의 종자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2015년 9월 이 종자들을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시리아에 보관 중이던 종자들이 대부분 소실됐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국제종자저장고 계획을 이끈 캐리 파울러는 이를 두고 “저장고를 건립 목적에 따라 이용하는 마지막 사례이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사과, 수박, 감, 대추 같은 과일을 먹을 때가 아니면 우리가 식물의 씨앗을 볼 기회는 별로 없습니다. 어떤 식물의 씨앗이 사라지면 지구에 사는 생명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평소에 보기 힘든 씨앗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