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안문 시위 당시 강제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가 5년간 감옥살이를 한 쉬친셴(徐勤先) 전 중국 인민해방군 38군 사령관의 재판 영상이 최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됐어요. 이 재판은 1990년 비공개로 열린 군사재판이었는데, 35년 만에 갑자기 공개돼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죠.
천안문 시위는 1989년 중국 대중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인 대규모 시위예요. 당시 중국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했고, 수많은 사망자가 나왔어요. 천안문은 중국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여러 정치적 상황을 상징했습니다. 오늘은 천안문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알아볼게요.
황제의 공간으로 지어진 천안문
천안문은 베이징(북경) 자금성의 정문으로, 명나라 때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을 때 세워졌어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처음에는 난징(남경)을 수도로 정했어요. 그리고 아들들에게 군대를 주고 변방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중 베이징을 맡은 아들 주체가 가장 세력이 셌죠. 그런데 주원장은 아들이 아닌 열여섯 살이던 큰손자 주윤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줬답니다.
주윤문이 황제가 되면서 변방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자, 주체가 다른 형제들과 난을 일으켰어요. 결국 주체가 승리하며 세 번째 황제가 됐죠. 주체는 조카를 죽이고 황제가 됐기 때문에 조카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난징에 계속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21년 베이징으로 수도를 바꾸고 그곳에 자금성을 세웠어요. 이후 황제가 즉위하거나 결혼할 때, 황후를 정할 때마다 천안문에서 조서(황제의 명령을 알리는 문서)를 공포했어요.
명나라 뒤를 이어 청나라 시대에도 자금성은 황제를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가 쇠락하면서 자금성의 천안문 역할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 말기에는 반란과 개혁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서양의 침략도 있었어요. 1899년 의화단이라는 단체는 ‘부청멸양(청을 도와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서양의 상징인 교회를 습격하고 철도·전신 등을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일본·러시아·영국 등 8국 연합군이 의화단을 진압했어요.
이때 연합군은 천안문에서 열병식을 치르며 청나라에 대한 멸시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는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지면서 ‘황제의 공간’이라는 천안문의 의미도 사라졌습니다.
천안문에서 목소리를 낸 중화민국 민중
중화민국 초기에는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천안문 광장도 대중에 개방됐죠. 하지만 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중화민국의 대총통 자리에 오른 위안스카이가 독재 정치를 시작했거든요.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이어지고 보수적인 유교 문화로 다시 돌아가자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를 비판하며 신문화 운동을 펼쳤어요. 민주주의와 서양의 실용주의, 과학 등을 강조하며 ‘새로운 중국’을 만들자는 것이었죠.
당시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파리 강화회의(전쟁을 하던 나라들이 화해하기 위한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패전국 독일이 중국 산둥성에서 누리던 특권을 승전국이었던 일본이 갖도록 결정됐고, 중국 정부도 이에 동의했어요.
이 사실이 중화민국 민중에게 알려지자 5월 4일 베이징대 학생 3000여 명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강화 조약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어요. 학생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점점 일반 시민도 참여한 대중 운동으로 확산됐어요. 결국 중국 정부는 입장을 바꿔 조약을 거부했습니다. 5·4 운동은 천안문이 처음으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 역사적 사건이었어요.
천안문에서 마오쩌둥 숭배한 홍위병
이후 1946년 공산당은 중화민국을 이끌던 국민당과 전쟁을 벌였어요. 공산당이 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이 30만명이 모인 천안문 광장에서 새로운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알리는 행사를 열었어요.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성 둘레에 쌓은 담)에서 건국을 선포했어요. 이후 천안문 광장은 지금처럼 남북 880m, 동서 500m로 약 1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조됐어요. 처음 면적의 4배 규모였죠.
그런데 이 넓은 광장이 마오쩌둥 숭배를 위한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마오쩌둥 초상화는 5월 1일 노동절과 10월 1일 국경절에 맞춰 열흘 정도 천안문 성루에 걸렸어요. 그런데 1966년부터는 초상화가 지금처럼 1년 내내 걸리게 됐죠. 바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였어요.
문화대혁명은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며 일어났습니다. 대약진 운동은 마오쩌둥이 경제를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시켜 중국을 공업·농업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추진한 운동이에요. 하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죠.
마오쩌둥은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1966년부터 약 10년간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등을 타파하겠다고 한 것이죠. 문화대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홍위병이었어요. 홍위병은 학생으로 구성된 정치 운동 조직인데, 마오쩌둥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초기 문화대혁명을 주도했죠.
1966년 8월 18일,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 100만명이 천안문 광장을 가득 메웠고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에 올랐어요.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어록을 흔들며 열광했죠. 홍위병은 전국을 돌며 낡은 것들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어요. 홍위병은 자신들과 견해가 다르면 그들의 부모나 스승을 비판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어요. 홍위병들은 수많은 문화재와 유산도 파괴했어요.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끝났습니다.
아픈 역사를 담은 천안문
이후 천안문 광장은 민중의 목소리가 무참히 짓밟힌 아픔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어요. 1980년대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으로 경제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지 못한 상태였죠.
그러다 1989년 4월 15일, 개혁의 상징이었던 후야오방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도하기 위한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였어요. 추도 시위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확대됐고, 5월에는 시민들도 시위에 참가했어요. 그러나 정부는 이를 ‘폭동’이라고 하면서 6월 4일 일요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무력으로 진압하도록 했죠. 민주화에 대한 민중의 염원이 무참히 짓밟힌 것입니다.
오늘날 천안문 광장은 누구나 걸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에요. 하지만 그 바닥 아래에는 중국의 아픈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