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지방 사찰이나 정원에 가면 넓은 잎이 치렁치렁한 이국적인 식물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파초입니다. 김동명의 시 ‘파초’에는 ‘조국을 언제 떠났노/파초의 꿈은 가련하다/(중략)/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는 대목이 있습니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라는 첫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원래 우리나라에 살던 종은 아니고 중국에서 들어온 식물입니다.

파초는 바나나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생물 분류 단위 중 ‘속(屬)’까지 바나나와 같기 때문입니다. 파초는 온대성이지만 영하 10~12도까지 견뎌 남부 지방에서는 야외에서도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정원에 심었고 글이나 그림으로도 많이 남겼습니다. 속세를 벗어나는 것(탈속)을 상징하기도 해서 사찰에 심기도 했습니다.

전남 해남 대흥사에 있는 파초. 파초는 속세를 벗어난다는 ‘탈속’을 상징해 사찰에 많이 심습니다. /김민철 기자

반면 바나나는 5도 이하로 내려가면 피해를 입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이 겨울에 서리가 내리는 온대 지역에서는 야외에서 키울 수 없습니다. 농가에서는 온실 속에 키우기도 하지만, 일반인은 식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동남아 등 열대·아열대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지요.

그럼 파초와 바나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파초는 바나나에 비해 열매를 잘 맺지 못하고 열매가 열려도 크기가 5∼10㎝로 작은 점, 바나나 잎 뒷면에서는 분 같은 흰 가루가 묻어나지만 파초 잎은 그렇지 않은 점 등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꽃이 피면 포엽(꽃대의 밑에 있는 비늘 모양의 잎)의 색깔로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파초의 포엽은 노란색이지만 바나나의 포엽은 짙은 자주색입니다. 우리나라 야외에서 보는 것은 대부분 파초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는 남자 주인공 길상이 나올 때 여러 번 파초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길상의 아들 윤국이 독립운동을 하다 옥중에 있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때, 길상이 경남 하동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자식들과 만날 때에도 파초가 나옵니다. 하동은 남해안 지역이라 앞뜰에 파초가 있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길상이 나올 때 파초가 등장하는 횟수가 많아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파초와 길상을 연결해 놓은 것 같습니다. 파초는 사람들이 햇빛이나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잎이 넓습니다. 넓은 품으로 사람들을 포용하는 길상의 성격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도 어쩌다 야외에서 파초를 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정원에도 커다란 파초가 자랍니다. 서울에서 파초가 겨울을 나게 하려면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가을에 밑동을 잘라낸 뒤 잘라낸 밑동을 헌 이불이나 비닐 등으로 덮어주거나, 땅속 뿌리를 캐내 잘 감싸 얼지 않게 관리해 주는 것입니다. 3월 중순 이후 헌 이불과 비닐 등을 벗겨내면 뿌리에서 새로운 줄기가 돋아나와 3m 이상으로 크게 자란다고 합니다. 간송미술관 파초도 이런 식으로 관리해서 잘 자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