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건축 거장 프랭크 게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그는 20세기 건축의 흐름을 바꾼 인물로 평가받아요. 직선과 질서를 중시하던 기존의 건축 틀을 벗어나, 건물을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처럼 다뤘거든요. 특히 티타늄이라는 금속 소재를 활용한 건축물을 많이 설계했어요.
그중에서도 스페인 빌바오에 세워진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이 미술관은 쇠락하던 회색빛 공업 도시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대체 이 미술관은 어떻게 그런 변화를 이끌었는지 우리 함께 살펴볼까요?
강변에서 시작된 기적 ‘빌바오 효과’
스페인 안에 있지만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빌바오는 한때 철광석 광산과 조선소로 번성했던 도시였어요.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철강 산업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실업률은 35%까지 치솟았고, 스페인과 바스크 지방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테러까지 일으키면서 도시는 빠르게 황폐해졌어요.
1991년 바스크 지방은 도시 재생의 돌파구를 문화 산업에서 찾습니다. 1억달러(약 1477억원)가 넘는 돈을 투자해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분관을 세우기로 결정했어요. 컨테이너를 보관하는 장소였던 네르비온 강변에 도시를 대표할 미술관을 세우고, 그 주변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이었지요.
이 프로젝트를 맡은 이가 바로 프랭크 게리였어요. 그는 전투기와 우주 항공 설계에 사용되는 특수 설계 기술을 건축에 도입합니다. 무려 3만3000장의 티타늄 강판을 종이처럼 자르고 붙여 하나의 미술관을 거대한 조형물로 완성한 거예요. 미술관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옆에서 보면 우주선 같은데, 앞에서 보면 한 송이 꽃처럼 보여서 ‘금속으로 만든 꽃’이라는 별명도 얻었답니다.
1997년 미술관이 개관하자 이 실험적인 건축물은 곧 빌바오의 랜드마크가 됐어요. 개관 후 10년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다녀간 관람객은 986만명, 이들이 도시에 머물며 지출한 비용은 16억유로(약 2조1000억원)에 달했어요. 도시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고, 시민들은 다시 자부심을 갖게 됐어요. 이 사례는 ‘문화가 도시 경쟁력을 높인다’는 뜻의 ‘빌바오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어요.
온몸으로 체험하는 조각들
미술관 뒤편으로 가면 관람객은 거대한 거미 조각을 가장 먼저 만나게 돼요. 프랑스 미술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청동 조각 ‘마망(Maman)’이에요. ‘마망’은 프랑스어로 엄마를 뜻해요. 부르주아는 거미가 집을 짓고 알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해요. 이 작품은 두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작가가 어머니에게 바치는 작품이랍니다.
도심 쪽에서 오는 관람객들은 미술관 앞에 있는 초대형 강아지 조각과 마주하게 됩니다. 높이 12m에, 3만8000송이 꽃으로 뒤덮여 있답니다. 미국 현대미술가 제프 쿤스의 1992년 작품 ‘강아지’로, 계절마다 꽃이 바뀌지요. 개관 때부터 미술관을 지켜온 이 강아지는 이제 빌바오를 상징하는 수호견처럼 여겨지며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미술관은 총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1층에는 전시실과 카페, 레스토랑이 있고, 2·3층에는 기획 전시실과 소장품을 보여주는 상설 전시실이 있어요. 미술관 내부에서 관람객을 처음 맞이하는 곳은 아트리움이라 불리는 1층 중앙 홀이에요. 바닥에서 천장까지 무려 50m 높이예요. 여기서 여러 전시실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간답니다.
아트리움과 연결된 104번 전시실은 이곳에서 가장 큰 전시실이에요. 길이 130m, 폭 80m인 이 거대한 공간은 미국 조각가 리처드 세라의 작품을 위해 설계됐어요. 이곳에는 철판 구조물 사이를 직접 걸을 수 있는 설치 작품 ‘시간의 문제’가 전시돼 있어요. 단순한 타원에서 소용돌이 모양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통과하며, 관람객들은 계속해서 변하는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바로 이 전시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거예요. 이처럼 특정 장소를 위해 제작된 작품을 ‘장소특정적 미술’이라고 불러요.
빌바오 구겐하임을 위해 탄생한 작품들
1층 101번 전시실에 설치된 ‘빌바오를 위한 설치’ 역시 미술관이 미국 예술가 제니 홀저에게 의뢰해 탄생한 작품이에요.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LED 전광판 9개에는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영어, 스페인어, 바스크어로 번갈아 나타납니다. 전광판 앞면 단어들은 붉은빛을, 뒷면 단어들은 푸른빛을 내요. 이 단어들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재빠르게 오르내리며 전시실을 역동적으로 만들어 줘요. 바스크 문화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지요.
솔 르윗의 벽화 ‘208번 방을 위한 기하학적 형태’도 이 미술관을 위해 제작됐어요. 강렬한 색들이 벽면을 가득 채운 이 공간 안에 서 있기만 해도 압도되는 느낌이 들어요. 이렇게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이곳에 와야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작품이 많답니다.
35만명 사는 도시에 연간 100만명 몰려
기획전 역시 큰 화제를 모으곤 합니다. 2001년 열린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의 회고전에는 50만명 이상 방문했고, 같은 해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도 4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어요. 35만명이 사는 도시라는 걸 감안하면 참으로 놀라운 숫자지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덕분에 인구 35만명에 별다른 관광거리도 없던 공업 도시는, 해마다 100만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인 문화 관광 도시가 됐답니다.
과감한 투자, 구겐하임이라는 유명한 미술관 브랜드, 프랭크 게리의 혁신적 건축, 그리고 수준 높은 소장품과 기획전이 맞물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성공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또 문화와 건축을 통해 한 도시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도 보여줬어요. 오늘날 세계 곳곳의 도시들이 빌바오를 벤치마킹하려는 이유도 바로 이 가능성을 믿기 때문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