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지음 l 김탁환 옮김 l 출판사 민음사 l 가격 1만2000원

“아버님이 낳으시고 어머님이 기르신 은혜가 깊은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서 주인공인 홍길동이 아버지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대목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오늘날 행정안전부 장관, 인사혁신처장에 해당하는 ‘이조판서’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홍 판서는 길동을 꾸짖어요. “재상 집안에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 너뿐이 아니거늘, 네 어찌 방자함이 이와 같으냐?”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길동을 아버지는 왜 이렇게 꾸짖었을까요?

길동의 어머니는 홍 판서 집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소유한 재산으로 여겨지는 천민 신분이지요. 조선 시대에 어머니가 천민인 사람은 서얼이라 불리며 차별받았습니다. 서얼은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없습니다. 능력이 뛰어나도 뜻을 펼칠 기회가 없는 것이죠. 울분이 쌓여 가던 길동은 홍 판서의 첩이 자신을 죽이려 보낸 자객을 죽이고 집을 떠납니다.

길동은 도적 떼의 우두머리가 돼서 자신의 별명을 가난한 이를 살린다는 뜻의 ‘활빈당’이라 짓습니다. 그가 거느린 도적 떼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활빈당은 관리들이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길동은 모습을 감추거나 변신하는 둔갑법,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축지법, 허수아비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드는 분신술을 펼칩니다.

나라에서는 길동을 잡으려 하지만 길동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구름에 싸여 사라지고, 잡았다 싶으면 허수아비입니다. 길동은 제도라는 섬으로 들어가 농사에 힘쓰며 병사들을 훈련시킵니다. 요괴에게 붙잡힌 처자 둘을 구해내 혼인하여 가정을 이룬 길동은 율도국이라는 나라를 정복하고 자신이 왕이 돼서 30년 동안 다스립니다.

저자 허균은 임진왜란 때 아내와 자식을 잃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굶주린 백성은 고통받습니다. 임금은 그런 백성을 구할 뜻도 없어 보입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욕심을 채우고 백성을 괴롭힙니다. 태어난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기도 합니다. 허균은 자신이 살던 조선의 모습을 ‘홍길동전’에 담았습니다.

허균은 오늘날의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을 합친 것과 비슷한 형조판서까지 지냈지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홍길동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허균이 외칩니다. “아름답구나! 길동이 행한 일들이여! 자신이 원한 것을 흔쾌히 이룬 장부로다. 천한 어미 몸에서 태어났으나 가슴에 쌓인 원한을 풀어 버리고 한 몸의 운수를 당당히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