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서 쌀값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고공 행진하고 있어요. 일본 농림수산성이 지난달 초 전국 마트 1000곳의 쌀 5㎏ 가격을 조사해보니, 평균 4316엔(약 4만원)으로 나타났다고 해요. 직전 최고치는 지난 5월 5㎏당 4285엔이었는데, 이를 경신한 겁니다. 최근에는 한 일본 부부가 쌀을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대요.
전문가들은 쌀값 급등 현상이 일본 정부의 비합리적 농업 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해요. 정권을 잡고 있는 자민당이 일본 농민들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외국 쌀 수입을 막고 자국 내 쌀 생산을 줄이는 정책을 추진한 영향 때문이랍니다. 쌀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져 농민 수익이 줄어들 수 있다고 보고, 이같이 한 거죠.
이 때문에 당분간 일본 쌀값은 안정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아요. 그런데 약 100년 전에도 일본에서 쌀값이 폭등한 적이 있답니다. 당시 ‘쌀 소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됐어요. 특히 그 당시는 일제강점기 때여서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오늘은 당시 일본에서 벌어진 ‘쌀 소동’에 대해 알아볼게요.
1차 세계대전 이후 부족해진 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각국에 큰 정치·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어요. 패전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심하면 영토를 잃기도 했던 반면, 승전국은 경제적 이익을 얻으면서 국제 사회에서 지위를 높였죠. 당시 일본은 승전국이었습니다. 전쟁 장소가 주로 유럽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고, 전쟁 동안 국내 공업화가 이뤄져 자본주의도 급속도로 발전했어요. 이에 힘입어 당시 일본 인구는 매년 70만명씩 증가했답니다.
그런데 정작 농업 생산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했어요.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니 쌀값은 계속 올라갔습니다. 도쿄 도매시장 기준으로 일본 쌀값은 1석(약 144㎏)당 16.37엔(1917년 1월)에서 39.18엔(1918년 8월)까지 올랐어요. 약 1년 반 만에 2배 이상으로 폭등한 겁니다.
일본 국민은 정부의 대책을 기다렸지만, 상황은 더 좋지 않게 돌아갔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에서 일어난 소련 내전에 군대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죠. 군대는 식량 등 물자가 많이 필요한데, 현지에서 구하기 어렵다 보니 일본에서 직접 가져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시베리아 파견군을 위해 일본 정부가 쌀을 자국 내에서 대량으로 사들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안 그래도 비쌌던 쌀값이 더욱 뛰었어요. 또 군의 파견 소식을 일찍이 알게 된 일본 재벌들은 쌀값이 오를 것을 예측하고 미리 쌀을 한꺼번에 구매한 뒤 가격이 올랐을 때 팔려고 쌓아두기도 했답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일본 국민이 그해 본격적으로 저항했는데, 이를 쌀 소동이라고 불러요.
쌀 소동의 시작
1918년 7월 22일 저녁, 일본 도야마현 우오즈 항구에 부녀자들이 모였어요. 산지에 둘러싸인 평야가 있는 도야마현은 일본에서 논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었죠. 그러나 이곳에서조차 쌀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홋카이도 등 다른 지역으로 출발할 배에 쌀이 실린 모습을 본 부녀자들은 “쌀을 다른 지역으로 반출하지 말고 주민에게 팔아 달라”고 호소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켰습니다.
이런 와중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일본 수상(총리)은 1918년 8월 2일 기자회견을 열고,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아예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결국 우오즈 항구 소식에다 시베리아 출병 공식 발표 등의 영향으로, 8월 3일 도야마 현청이 있는 도야마 시에서는 2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벌이게 됩니다. 이들은 도매 상인들과 부자들에게 쌀을 정부에 넘기지 말고 일반 사람들에게 팔아 달라고 요구했어요. 또 사흘 뒤인 6일에는 집회에 1000명 넘게 모였죠. 집회가 끝난 뒤에는 쌀 가게로 몰려가 강제로 쌀 1석을 35엔에 팔도록 했습니다.
산미 증식 계획으로 조선 쌀 수탈
도야마 시에서 쌀을 싸게 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했어요. 8월 10일에는 교토와 나고야 등 대도시에서도 소동이 일어났어요. 군중은 각지에서 매점매석하여 쌀값을 올리고 있던 상인들을 공격했고, 11일 고베에서는 유통 재벌 스즈키 본사가 불타기도 했어요. 12일에는 전국에서 쌀 가게 습격이 잇따르며 상인들은 1석 30엔에 팔기를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쌀 소동은 탄광으로도 번졌어요. 광부들이 출동한 군대와 경찰에 다이너마이트로 맞서는 사태도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13명이 죽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죠. 8월 14일 데라우치 수상은 쌀 소동에 대한 언론 보도를 금지하고 군을 출동시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어요.
우리나라도 일본의 쌀 소동으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쌀 소동으로 놀란 일본 정부는 쌀 공급을 늘리기 위해 ‘산미 증식 계획’을 세워 식민지였던 조선의 쌀을 수탈했거든요. 산미 증식 계획으로 조선의 쌀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늘어난 양보다 일본으로 빠져나간 양이 더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 사람 1명당 쌀 섭취량은 오히려 떨어졌고, 식량 부족으로 중국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으로 배를 채워야 했어요.
일본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지다
쌀 소동은 강경한 진압으로 잠잠해졌어요. 약 50일 동안 소동은 369번 발생했고, 진압에만 군인 10만명이 투입됐죠. 7786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그중 2명에게는 사형, 12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등 강한 처벌이 뒤따랐어요.
민심이 흉흉해지자 9월 21일 데라우치는 수상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요. 요동치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당시 다이쇼 일왕은 일본 역사상 최초로 지위가 없는 평민인 하라 다카시를 새 수상으로 임명했습니다.
쌀 소동은 ‘다이쇼 데모크라시(1910~1920년대 일본 민주주의 운동)’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정당 중심 정치가 자리 잡고 노동자들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당시 언론 보도 통제에 맞서 쌀 소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한 아사히 신문은 정치·사회 문제를 다루는 신문으로 명성을 굳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