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 은(銀) 가격이 14년 만에 온스당 40달러를 넘어섰다고 해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곧 금리를 내릴 거라는 기대가 커지자, 사람들은 금이나 은처럼 값이 안정적인 ‘안전 자산’을 찾기 시작했어요. 시중에 달러가 많이 풀리면 달러 가치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가치를 지니는 은을 보유하려는 심리가 커진 것이지요. 은값은 올해 들어서만 40% 넘게 올랐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은은 화폐와 무역을 매개하고, 제국의 흥망을 갈랐던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반짝이는 빛이 아름다운 은은 희귀하지만 금보다는 흔했고 가공도 쉬웠기 때문에 실생활과 화폐에 모두 쓰였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의 경제를 떠받치기도 했고, 대륙과 대륙을 이어 주는 교역망의 중심에 서기도 했지요. 오늘은 은 속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를 차례차례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은화. 앞면(왼쪽)에는 지혜와 전쟁의 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뒷면엔 지혜를 상징하는 올빼미가 새겨져 있어요.
볼리비아 해발 4000m 고산지대에 위치한 포토시 전경. 1545년 이곳에서 은 광산이 발견됐어요.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도 쓰였죠

은은 수천 년 동안 보석, 동전, 종교 의식에 쓰는 그릇이나 장식품에 활용되어 왔습니다. 은을 캐고 다듬던 초기 중심지는 오늘날 그리스와 튀르키예 지역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아테네 근처의 라우리움 은광은 오랫동안 중요한 은 공급지였습니다. 고대엔 이곳에서 해마다 약 30톤에 달하는 은이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아테네가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되었지요. 로마 제국도 은을 보석이나 화폐로 널리 사용했답니다.

하지만 15세기 말에 이르자, 유럽의 은광들은 점점 고갈되어 더 이상 충분한 은을 캐낼 수 없었어요. 바로 이 무렵, 대항해 시대가 시작됩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나라들은 신대륙과 아시아로 항해하며 금·은·향신료 같은 자원을 찾기 위해 경쟁했지요.

그러던 1545년, 지금의 볼리비아 고원지대에서 거대한 은광이 발견됩니다. 바로 포토시(Potosí) 은광이에요.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전 세계 은의 절반 이상이 포토시에서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캐낸 은은 스페인 본토로 유입됐고, 또 일부는 멕시코의 아카풀코 항을 거쳐 필리핀 마닐라로 보내져 중국 등 동아시아까지 흘러갔어요.

포토시 은광이 세계 경제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유럽으로 대량의 은이 유입된 결과, 물가가 크게 오르는 ‘가격 혁명’이 일어났고, 국제 무역은 빠르게 확대되었답니다. 포토시의 은은 그야말로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동력이었지요.

하지만 포토시의 눈부신 발전 뒤에는 참혹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원주민들을 광산으로 끌고 가 강제로 노동을 시켰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요. 포토시의 은은 스페인을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와 식민지 착취의 어두운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6~18세기에 주로 사용됐던 스페인 갤리언선의 모형이에요. 상선과 전함으로 쓰였어요.
청나라인들이 아편을 폐기하는 장면을 그렸어요.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벌인 아편전쟁은 사실 ‘은’ 때문에 벌어졌어요. /한국은행·위키피디아

은 사용하며 세계 무역 확대돼

포토시에서 캐낸 은 덕분에 16세기 중반부터 약 250년 동안 마닐라-아카풀코 갤리언 무역이 이어졌습니다. 갤리언은 당시 유럽이 만든 대형 범선으로, 길이 50~60m에 수백 톤의 물자를 실을 수 있는 배였습니다. 멕시코 아카풀코 항에서 출발한 배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은이 가득 실렸고,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중국 상인들이 이 은을 받아 갔습니다. 그 대신 비단·도자기·차 같은 값비싼 물건들이 유럽으로 향했지요.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는 은으로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16~17세기 중반까지 명나라에 들어간 은의 대부분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것이었다고 해요. 이렇게 해서 유럽·아메리카·아시아는 은을 매개로 하나의 거대한 경제권으로 묶였습니다. 마닐라는 국제 무역항이 되어 일본·중국·멕시코·스페인 사람들이 함께 살며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초, 은은 경제뿐 아니라 국제 정세를 뒤집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청에서 막대한 양의 차·비단·도자기를 수입하고 그 대가로 은을 지불했어요. 그 결과, 영국의 은 보유량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무역 적자가 심각해졌죠. 이때 영국이 선택한 수단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이었습니다.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은을 다시 거둬들이는 방식이었지요.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은 심각해졌고, 청나라 재정은 은 유출 때문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청나라는 1839년 관리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해 강력한 아편 단속에 나섰습니다. 그는 영국 상인의 아편을 몰수해 불태웠고, 이 사건으로 양국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지요. 결국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이 터졌습니다.

이 전쟁은 겉으로는 아편 문제였지만, 사실상 은을 둘러싼 충돌이었습니다. 은을 잃은 영국과 은을 지키려 한 청나라가 맞부딪친 것이지요. 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42년 난징 조약을 맺어 홍콩을 내주고 항구를 열어야 했습니다. 이 불평등 조약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중국 침략을 더욱 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금본위제’ 채택되며 가치 떨어졌죠

하지만 은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떨어졌습니다.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자 다른 유럽 나라들도 하나둘 금을 기준으로 삼게 되었지요. 금본위제란 나라의 화폐 가치를 금과 연결해 정하는 제도예요. 은은 많이 캐내면 가치가 쉽게 떨어졌지만, 금은 희소성이 크고 값이 안정적이어서 국제 무역의 기준 화폐로 더 신뢰받았죠.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경제 정책을 두고 ‘금본위제’와 ‘은본위제’가 격렬히 맞섰습니다. 1896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공화당 대선 후보 윌리엄 매킨리는 각각 은본위제와 금본위제를 지지했는데, 결국 윌리엄 매킨리가 승리하며 미국은 금본위제를 확립하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