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에서 ‘야금(冶金): 위대한 지혜’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요. 호암미술관은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년 개관한 우리나라 대표적 사립 미술관이에요.

‘야금(冶金)’은 광석에서 금속을 골라내거나 골라낸 금속을 정제해서 금속 재료를 만드는 일이에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야금 전시품은 바로 ‘가야 금관’으로 불리는 금관입니다. 1971년 국보(國寶) 138호로 지정된 이 금관은 이 선대 회장이 매일 출근할 때 밤새 잘 있었는지 물어봤을 정도로 가장 애지중지한 소장품이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떤 유물이기에 그리 아꼈을까요?

①호암미술관이 소장한 가야 금관이에요. 대가야 지배층이 묻힌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오른쪽 큰 사진) 45호에서 출토됐어요. 처음엔 금관의 제작지가 논란이 됐는데, 금관의 부속 금제품(②)이 나중에 지산동 고분군 45호에서 발굴된 부속 금제품(③)과 똑 닮아 가야에서 제작된 것이 확실해졌죠. ④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관 장식. ⑤경주 금관총에서 나온 신라 금관.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오세윤 작가

◇신분과 권위의 상징 ‘금관’

머리에 쓰는 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지요. 멀리서 봐도 재질과 형태 등으로 신분을 곧바로 드러내거든요.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금관은 모두 8점이에요. 그중 가장 많은 것은 신라 금관으로 6점이에요. 모두 5~6세기 때 신라 고분에서 출토됐어요. 일제강점기인 1921년 발굴된 금관총을 시작으로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에서 잇따라 금관이 나왔지요. 나머지 두 점은 가야 시대 금관으로, 하나는 호암미술관에, 하나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습니다.

고구려는 순금 금관은 없고 청동에 금을 입힌 금동관만 남아 있어요. 백제는 ‘검은 비단에 금꽃으로 장식했다’는 금관 관련 기록만 있었는데, 1971년 공주 무령왕릉에서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금관 장식이 출토됐어요.

신라 시대 금관들은 머리에 두르는 테두리에 가지 달린 나무를 형상화한 ‘출(出)자’ 모양과 사슴뿔 모양 세움 장식들이 붙어 있어요. 또 테두리 아래엔 긴 드림 장식이 귀걸이처럼 늘어뜨려져 있어요. 가장 먼저 발굴된 금관총 금관은 높이가 44.4cm(드림 장식 포함)예요.

신라 금관에 비해 호암미술관의 가야 금관은 높이 11.5cm, 밑지름 20.7cm로 크기가 훨씬 작아요. 그리고 머리에 두르는 띠 위에는 꽃 모양 장식 4개가 붙어 있는데, 신라 금관의 출(出)자 모양 장식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워요. 화려하고 웅장한 신라 금관과는 다른, 서정적인 분위기랍니다. 미술관은 이 금관과 함께 금관에 붙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반구형 등 금제 장식과 귀걸이·반지 등도 함께 보관하고 있어요.

◇우연히 풀린 금관의 비밀

호암미술관에 있는 금관은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호암 수집 문화재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됐을 땐 금관 제작지가 어딘지 의견이 분분했어요. 1960년대 초 경찰에 붙잡힌 도굴꾼들이 경북 고령의 대가야 시대 고분군에서 순금관을 파냈고 이를 장물 업자를 통해 이병철 회장에게 팔았다고 털어놨어요. 그래서 이 금관이 가야 금관이란 의견이 있었지만, 당시 가야가 이런 금관을 만들 정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며 신라 초기의 금관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지요.

사실은 우연한 계기로 드러났답니다. 바로 미술관이 금관과 함께 보관하고 있던 부속 금제품이 결정적 단서가 됐어요. 1977년 계명대박물관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45호 고분을 발굴했어요. 이 무덤은 발굴 전 이미 도굴꾼들이 휩쓸고 가 토기나 철기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도굴꾼들이 실수로 작은 금제품들을 남겨놨고 그걸 고고학자들이 찾은 거죠.

고고학자들이 찾은 작은 금제품 중 귀걸이가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금관 부속품 금귀걸이와 쌍둥이처럼 닮은 거예요. 이 금귀걸이들은 누금(鏤金: 금실이나 알갱이를 붙여 장식하는 세공 기술) 기법으로 화려하게 꾸몄고 속이 빈 금구슬 장식을 덧붙인 독특한 것이었어요. 결국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귀걸이가 지산동 45호 고분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면서 금관도 가야 것으로 여겨지는 거예요.

◇금관에 10여 명 순장자까지… 주인은 누굴까

금관이 나온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 연맹의 하나였던 대가야(大伽倻)의 지배층이 묻힌 무덤군으로, 현재까지 700여 기가 확인됐어요. 1세기 김수로가 한반도 남쪽 낙동강 유역에 세운 가야는 작은 나라들로 이뤄진 연맹 국가였어요. 초기엔 금관가야가 주도했지만, 후반에는 대가야가 중심 세력이 됐죠.

높은 구릉 위에 커다란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듯해요. 특히 금관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45호 고분은 봉토 지름이 23m에 달하고, 무덤에선 14명이나 되는 순장자의 흔적이 확인됐어요. ‘순장(殉葬)’은 권력자가 죽으면 노예나 하인 등을 함께 매장하는 걸 말해요. 바로 옆 44호 고분(37명) 다음으로 많은 순장자 수라고 합니다. 금관까지 썼고 많은 순장자와 함께 묻힌 무덤 주인은 대가야의 왕이나 왕비였을 수 있어요.

삼국시대 국가들이 이렇게 거대한 무덤을 경쟁적으로 만든 건 현세에서의 삶이 죽어서도 이어진다는 ‘계세(繼世) 사상’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신라는 6세기 초 이후 대형 고분도 점차 사라지고 순장도 폐지했어요. 대신 현실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키웠죠. 하지만 가야는 여전히 종전 장례 풍습을 고수했어요. 500년 넘게 번성하던 가야가 결국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 이유도 어쩌면 이런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금관 나무 장식, 크리스마스트리… ‘수목 숭배’ 보여줘요]

만들어진 국가와 상관없이 금관에는 나무나 꽃 모양 장식이 많아요.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수목(樹木) 숭배’ 사상과 관련이 있대요. 수목 숭배는 나무가 죽은 자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자 생명이 내려오는 장소라고 생각해 신성시하는 거예요. 넓게는 ‘식물 숭배’라고도 해요.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처음 지상으로 내려온 곳이 신단수(神壇樹)라는 나무 아래였던 것도 이런 사상을 보여주죠. 그래서 고귀한 신분이 쓰는 금관에 나무 장식을 했다는 거예요. 마을 어귀 나무 앞에 돌 무더기를 쌓아놓고 비는 ‘서낭당’ 역시 이런 수목 숭배를 보여줘요. 서양의 크리스마스트리도 나무가 나쁜 기운을 물리쳐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은 데서 시작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