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야... 어떻게 이렇게 다 탈 수가 있어...”
12일 오전 11시 30분, 화마(火魔)가 뒤덮고 간 강원도 강릉시 안현동. 화재로 무너져버린 집을 찾은 정용주(66)씨는 현장에 도착하기 전 저 멀리서부터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새까만 잿더미와 깨진 유리 파편이 깔린 바닥을 거닐었다.
화재로 잿더미가 된 안현동 현장을 찾은 정씨는 이곳에서 막내아들 이장우(36)씨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한 쪽에는 두 모자가 사는 작은 집, 그리고 집 옆에는 2층짜리 수장고가 딸린 화실이 있었지만 이번 화재를 피할 수 없었다. 이씨는 4살 때 자폐증 진단을 받았지만, 7살 때부터 취미로 그림을 시작해 강릉을 대표하는 ‘자폐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매일같이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씨는 2022년까지 열두 번째 개인전을 열 정도로 그림 활동에 전념했다.
이씨 모자에게 안현동 자택과 화실은 단순한 의미 그 이상이었다고 한다. 작고한 아버지 고(故) 이종식씨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약사였던 이종식씨는 운영하던 약국을 처분하고 받은 권리금으로 화가 아들을 위한 집과 화실을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씨는 화실이 완공되기 한 달 전인 2021년 6월 담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모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화실의 이름을 ‘아빠와 이장우의 화실’로 지었다. 이후 화실에서 ‘아빠와의 여행’을 주제로 하는 전시회를 열거나, 아버지와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화재로 화실은 물론 아버지가 손수 아들을 위해 만들었던 나무 수장고도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현장을 찾은 정씨는 충격을 받을까 싶어 아들 이씨를 현장에 데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씨는 “아들이 그린 그림 400점이 모두 타버렸다”며 “올해 7월 강릉에서 열릴 세계합창대회에 맞춰 개인 기획전을 열 예정이었는데 물거품이 돼버렸다”고 했다. 정씨에 따르면 산불 발생 초기에는 그림이 있던 2층 수장고와 화실까지 불이 붙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이 빠른 속도로 번진데다가 대부분의 그림이 불이 붙기 쉬운 재질인 유화 작품이라 한순간에 불이 붙어 손 쓸 틈도 없이 몸만 겨우 빠져 나왔다고 한다.
화재로 충격을 받은 이씨가 어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 정씨가 오랜 시간 ‘네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무엇이든 그리게 해주겠다’고 설득하자 “엄마, 나 다시 태어났어”라고 하면서 마음을 풀고 다시 그림 작업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정씨는 “아들이 재기할 힘을 얻길 바랄 뿐”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