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경기 성남의 가천대학교 AI 공학관 6층. 호텔 로비처럼 잘 꾸며진 공간에 우아한 형제들(배달의민족) 김봉진 의장, 위메프 허민 의장 등 한국의 대표 벤처기업 창업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날은 국내 최초로 창업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단과대학 ‘가천코코네스쿨’ 개소식이 열린 날이었다.

가천코코네스쿨은 가천대 동문이자 NHN재팬 대표를 지낸 천양현 코코네 회장이 작년 11월 가천대 측에 창업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지원 의사를 밝혀 설립됐다. 아이디어가 나온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설립 준비를 마치고 올 2학기 출범했다. 한국 대학들은 학과 하나 신설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첨단 분야 학과를 신설하려 해도 자기들의 정원(定員)과 자원을 내놓지 않으려는 기존 학과 반발에 부딪혀 몇 년을 끌다가 뻐그러지는 일이 수두룩하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단과대학이 생겼으니 큰 화제를 모았다.

가천대 지하철역에서 캠퍼스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 끝에 설치된 분수광장. 하늘처럼 꾸며진 천장(스카이 실링)에서는 비가 내리거나 천둥 번개가 치고, 구름 낀 날씨가 연출되기도 한다. /가천대학교

천 회장은 2560㎡ 공간 조성에 30억원을 기부했다. 그는 인사말에서 “기업이 자기 일도 하기 쉽지 않은데 학생을 키우는 일에 참여하자니 많이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기업도 더 성장해야 하고 그 지식이 쌓여 다음 세대로 전달돼 진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면서, “특히 총장님과 교수님들의 의지와 추진력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이처럼 놀라운 속도로 새 단과대학을 만든 것은 가천대가 추진해 온 대학 혁신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대학 개혁이 어려운 건 교육부의 규제 때문도 있지만 학과 이기주의 등 대학 내부의 이권 다툼, 리더십 부재, 구성원 간 불신 등도 큰 이유다. 가천대는 한국 대학의 공통된 한계를 이겨내고 눈에 띄게 변하고 있다.

가천대는 10년 전 무려 대학 4곳(가천의대·가천길대학·경원대·경원전문대)을 통합해 탄생했다. 4년제 사립대 간 첫 통합 사례였다. 중복 학과 통폐합으로 학과 51개(41.5%), 입학 정원 3008명(43%)이 줄었다. 또 지난해엔 전공과 관계없이 실력 있는 교수를 뽑는 파격적인 교수 초빙 제도도 도입했다. 학생들에게 필요하다면 규정을 수십 개씩 고쳐가면서 교육 혁신 프로그램(’P학기제’ 등)을 만들었다. 산업 수요에 맞게 AI 학과, 배터리 학과 등을 국내 대학 최초로 설치하기도 했다. 이런 행보 때문에 “위기에 처한 한국 대학 개혁 방안을 가천대에서 배우라”는 얘기가 나온다.

1일 오후 경기 성남 가천대에서 창업대학‘가천코코네스쿨’개소식이 열렸다. 이길여 총장과 천양현(첫째 줄 왼쪽에서 다섯째·여섯째) 코코네 회장, 위메프 허민 의장과 우아한형제들 김봉진(첫째 줄 오른쪽에서 첫째·셋째) 의장 등이 참석했다.

◇총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개혁 이끌어

가천대의 혁신 비결로 우선 이길여 총장의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이 꼽힌다. 항간에는 “힘 있는 오너가 학교에 올인하니 가능한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1958년 인천의 작은 산부인과로 시작해 굴지의 종합병원(가천대 길병원)과 대학 4곳을 운영하게 된 이 총장은 ‘여자 정주영’으로 불리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10년 전 가천대 통합을 이뤄낸 후 줄곧 총장을 맡고 있다. “4년마다 총장이 바뀌는 다른 대학과는 리더십이 비교 불가”라는 말이 나온다.

이 총장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일화는 여럿이다. 가천대 캠퍼스와 연결되는 지하 통로에 있는 분수 광장은 하늘처럼 조성된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지는 웅장한 모습이다. 2006년 설계 당시 이 총장은 지하철역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길을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호텔의 하늘 천장(스카이 실링)처럼 꾸미자는 아이디어를 낸 뒤 “내일 당장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보고 오자”고 지시해 다음 날 비행기를 탔다. 가천대 한 교수는 “미혼인 이 총장이 사심(私心) 없이 대학 발전에만 헌신해 온 것을 많은 구성원이 알기 때문에 신뢰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장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거의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 1일 캠퍼스에 이 총장이 나타나자 학생들이 “사진 찍어요”라면서 달려들었다.

틀을 깨는 정책도 과감히 도입한다. 가천대는 올 2학기부터 도서관에 있는 책 600여 권을 학교 광장에 펼쳐 놓고 대출해준다. 학생들이 도서관을 잘 찾지 않자 캠퍼스를 오가다 쉽게 빌릴 수 있게 ‘오픈 라이브러리’를 만든 것이다. 책 수백 권을 옮겨야 하는 직원들은 힘들지만, 학생들 만족도는 높다. 신임 교수들이 원하는 책을 사서 사무실에 두면 학생들도 빌려볼 수 있게 예산도 지원한다.

가천대는 학생들이 도서관을 잘 이용하지 않자 도서관의 책 수백권을 광장에 진열해 놓고 학생들이 오다가다 볼 수 있도록 했다. /가천대학교 제공

◇학생 ”학교가 미래 먹거리 찾아준다”

올해엔 카카오엔터프라이즈와 함께 소프트웨어를 교육하고, 졸업 후 인턴십 채용 기회를 주는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주고자 대학 측은 카카오 측을 설득해 카카오톡의 대표 캐릭터 어피치(150㎝)와 라이언(195㎝)을 가천대에 설치했다. 카카오 관련 시설이 아닌 곳에 이 캐릭터들이 설치된 것은 처음이고, 사진 찍기 명소가 됐다. 컴퓨터공학과 2학년 김주석(26)씨는 “반도체, AI학과를 만드는 것만 봐도 우리 대학은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먹거리가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준비해준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가천대 무한대상 앞에 설치된 카카오톡 대표 캐릭터 라이언과 어피치. 올해부터 카카오엔터프라이즈와 소프트웨어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는 것을 계기로 교내에 설치됐다. /가천대학교 제공

대학 통합 때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통합 후 대학이 발전하자 대학 구성원 간 신뢰도 높아졌다. 가천대 한 교수는 “솔직히 경원대 시절엔 학회에 가면 이름표를 살짝 숨겨놓기도 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며 “통합할 때 텐트 치고 반대했던 교수들이 지금 학교가 좋아지는 모습을 보며 본부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실제 가천대는 여러 지표가 좋아졌다. 전임 교원 1인당 SCI급 논문 실적은 통합 이듬해 사립대 중 37위에서 올해 8위로 올라갔다. 입시 성적도 지난해 수시 지원자 수가 5만491명으로 국내 사립대 4위였다. 이만기 유웨이교육평가연구소장은 “10년 전엔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잘 모르는 대학에서 지금은 이름 대면 아는 괄목상대한 발전을 했다”고 말했다.

◇전공 불문 우수 교수 대거 뽑아

가천대는 지난해 우수 교수 확보를 위해 ‘자율 선택제’를 도입, 교수 76명을 뽑았다. 보통 대학들은 교수가 정년 퇴임하거나 결원이 생기면 해당 분야에 대한 공고를 내고 교수를 뽑는다. 결원이 안 생기면 아무리 우수한 교수가 있어도 못 뽑는 구조다. 반면, 자율 선택제는 분야 상관 없이 누구나 지원하게 하는 제도다. 이미 같은 전공 교수가 있더라도 연구 실적이 뛰어난 교수가 지원하면 추가로 뽑는다. 지난해 반도체 설계 분야 교수를 7명이나 뽑았는데, 기존 강의는 다 찼지만 새로운 과정을 개설해 강의를 할 수 있게 됐다.

가천대 고위 관계자는 “자기 분야에 잘하는 교수가 들어오면 기존 교수들도 학생들의 선택을 받으려고 수업 준비와 연구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면서 “당사자인 교수는 괴롭지만, 학생과 학과 경쟁력은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 제도로 임용된 약학대학 배문형 교수가 하버드 의대와 공동 연구한 논문을 지난 7월 세계적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가천대는 올해도 자율 선택제로 교수 78명을 뽑을 예정이다.

젊은 교수들을 끌어들여 변화에 적극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가천대는 2018년부터 30~40대 초반 교수 100명이 모여 대학 발전 방안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시냅스 포럼’을 운영한다. 연간 두 차례 이길여 총장이 직접 참석해 워크숍을 하는데 젊은 교수들이 수십 개의 아이디어와 건의를 쏟아낸다고 한다. 본부도 새로 추진하는 정책을 교수들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박경수 미래산업대학장은 “교수와 본부 서로 ‘원하는 걸 말하고, 그 방향이 좋으면 받아들여진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게 가장 긍정적인 변화”라고 했다. “그런 분위기가 있으니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추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수·직원들이 개혁 고통 감수해야 대학이 산다]

학령 인구 급감, 4차 산업혁명 시대 도래 등 대학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면서 대학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꼽힌다. 단순히 정원 조정뿐 아니라 대학 교육과 경영 방식 등을 총체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사회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은 63국 중 27위인데, 대학 교육 경쟁력은 46위였다. 지난해 전체 대학 입학 정원의 4만586명(8.6%)이 미달했고, 전문대는 미달률이 15.6%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대학 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대학에서 배출하는 인력이 산업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미스매치(불일치)를 꼽는다. 반도체·AI(인공지능) 등 첨단 분야 인재를 대학에서 충분히 길러내지 못해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기업들은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지난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매출액 500대 기업의 대졸 신규 채용 계획 인원 10명 중 6명(61%)이 이공 계열이었는데 지난해 4년제 일반대학 졸업자 중 이공 계열은 38%에 그쳤다. 대학들이 산업 변화에 맞게 자체 구조 조정을 해야 하는데 학과 이기주의, 이권 다툼 등으로 제대로 안 되는 것이다. 학과 구조 조정을 하려고 하면 교수·학생·동문들의 반대 시위로 몸살을 앓기 때문에 쉽사리 추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늘어나는 총장 직선제로 대학 개혁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 지역 한 사립대 교수는 “혁신하면 결국 교수나 직원들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데, 직선제 총장들이 자기를 뽑아준 구성원들이 반대하는 걸 추진할 수 있겠느냐”면서 “총장은 4년마다 바뀔 건데 뭐 하러 말을 듣느냐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고 말했다.

수십년간 이어져 온 정부 규제로 대학들이 스스로 개혁을 추진할 동력을 잃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는 대학 입학 정원뿐 아니라 14년간 등록금 인상을 막고 있다. 그 기간 재정이 괜찮은 일부 대학을 제외하곤 교수 월급을 동결했고 교육 혁신은커녕 학생 교육에도 제대로 투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