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찰이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을 쫓다 한 개집에서 발견한 ‘번호 변작 중계기(변작기)’ 모습. /경찰청

지난 8월 25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구로역. 경찰들이 플랫폼으로 막 들어온 열차 안으로 뛰어들더니,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앉아 있던 A(53)씨를 붙잡았다. 그가 갖고 있던 손가방 안에는 ‘번호 변작 중계기’가 있었다. ‘변작기’라고 불리는 이 장치는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일당들이 최근 주로 쓰는 핵심 장비다. 보통 해외에서 인터넷 전화를 국내로 걸면 전화번호 앞자리 ‘070′이 나타나는데, 이 장비는 070을 일반 휴대전화 앞자리 ‘010′으로 나타나게 한다.

A씨는 월 300만원을 받으며 변작기를 들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일을 했다.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고 계속 이동한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통신사가 불특정 다수에게 대량으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거는 변작기 위치를 알려주는데, 변작기가 계속 움직이는 게 이상했다”면서 “수사기관을 피하려 ‘인간 변작기’까지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현재 보이스피싱에 사용되는 변작기와 대포폰 등을 집중 단속하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18일 “지난 4~6월 3개월간 불법 변작기 9679대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번호를 위장하는 변작기만 철저하게 단속해도 시민들이 보이스피싱 여부를 훨씬 더 쉽게 알아차릴 것이라고 보고, 지난 8월부터 전국에서 170여 명을 투입해 2차 단속도 시작했다.

실제 경찰 내부에서는 변작기 찾기가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이라는 비유가 나온다고 한다. 통신사가 변작기 위치를 대략 알려주지만 현장에 가보면 방이 수십개인 다세대 주택 한 채가 있어 모든 방을 구석구석 뒤지기 일쑤라는 것이다.

거기다 경찰 단속을 피하기 위해 보이스피싱 일당은 갈수록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변작기를 숨기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은 원룸이나 모텔방을 빌려 변작기를 여러 대 숨겨 놓곤 했지만 경찰 단속에 계속 잡히자 수법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산 중턱이나 길가 풀숲에 배터리와 연결된 변작기를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빈 건물 옥상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후 패널 아래에 변작기를 숨겨둔 조직도 있었다. 그리고 태양광 발전으로 변작기에 전기를 공급한 것이다. 또 사람들이 잘 살펴보지 않는 다리 밑이나 건축 중인 아파트 건물의 환기구 속, 마당에 놓인 개집 안쪽이나 건설 현장 배전 설비함 속 등도 최근 등장한 변작기 은닉 장소다. 가방에 변작기를 들고 지하철을 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단속을 따돌리는 ‘인간 변작기’도 크게 늘었다고 한다.

국수본 관계자는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며 ‘기계 관리만 해주면 된다’면서 변작기 설치를 권하는 이들도 많다”면서 “변작기를 갖고 있다가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처벌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