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25년 만인 지난해 한국노총을 제치고 제1 노총이 된 민주노총의 차기 위원장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확인됐다. 민노총이 제1 노총이 된 뒤 처음 치르는 위원장 선거에서 조직적인 부정행위가 이뤄진 셈이라 파문이 예상된다.

민노총은 홈페이지를 통해 결선후보조를 소개하고있다./민노총 중앙선관위

14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민노총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8일 민노총 산하 건설노조 경기도건설지부와 지부 산하 조직에 선거관리 규정 위반으로 경고 조치를 내렸다. 조합원들에게 기호 3번인 양경수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권유하고, 실제 3번 후보에게 투표했는지를 확인하고, 이를 보고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3번 후보에게 몰표를 주도록 노조 집행부가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민노총은 내부 규정으로 특정 조직이 선거에서 중립을 어기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투표 역시 비밀투표가 원칙이다.

10일 오전 서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서 열린 2020 민주노총 위원장·수석부위원장·사무총장 선거 결선 투표 후보자-언론사 초청 합동토론회에서 김상구 기호1번 위원장 후보와 양경수 기호3번 위원장 후보가 투쟁 구호와 함께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정선거가 불거진 기호 3번 양경수 후보는 지난달 28일부터 지난 4일까지 치러진 1차 투표에서 득표율 31.3%로 1위를 기록했다. 민노총 안팎에선 양 후보의 위원장 당선이 유력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양 후보의 이력은 민노총 내부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는 한국외대 용인캠퍼스(현 글로벌캠퍼스) 출신으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속해 있는 ‘경기동부연합’ 소속으로 분류된다. 최근까지도 본인이 직접 이석기 전 의원의 석방을 주장했다. 노동계 관계자는 “이런 식이라면 민노총이 제1 노총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는커녕 국민들로부터 오히려 더 외면받을 것”이라고 했다.

민노총 새 위원장 선거에는 당초 후보 4명이 나왔고, 지난달 28일~지난 4일 1차 투표가 치러졌다. 당시 투표에선 기호 3번 양경수 호보가 18만9309표(득표율 31.3%)를 얻어 1위, 기호 1번 김상구 후보가 15만9464표(득표율 26.3%)를 얻어 2위를 기록했다.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민노총은 오는 17~23일 1·2위 후보자를 대상으로 결선 투표를 치러 새 위원장을 확정할 예정이다. 기호 1번 김상구 후보는 ‘교섭파’로, 기호 3번 양경수 후보는 ‘투쟁파’로 분류된다.

◇기호 3번에게 투표하게 조직적 개입

부정선거 문제가 불거진 것은 기호 3번 양경수 후보 쪽이다. 민노총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8일 작성한 알림 공문은 “해당 대상자들의 규정 위반의 선거운동이 확인돼 제재를 결정했다”고 적혀 있다. 대상자는 건설노조 경기도건설지부 및 지부 산하 1지대장 이모씨, 4지대장 김모씨, 현장팀장 박모씨, 홍모씨, 송모씨, 김모씨 등과 민노총 기호 3번 양경수 후보 등이다. 양 후보와 함께 러닝메이트로 함께 출마한 윤택근 수석부위원장 후보와 전종덕 사무총장 후보 역시 대상자에 포함됐다.

해당 공문에 따르면 건설노조 경기도건설지부 등은 단체 채팅방에서 기호 3번만을 홍보했다. 이와 별도로 ‘경기도건설지부 투표지침’이라는 것을 만들어 조합원들에게 3번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권유했고, 개별 조합원이 기호 3번에게 투표한 사실을 확인한 뒤 기호 3번에게 투표한 인원을 팀별로 보고하도록 했다. 민노총 중앙선관위는 알림 공문에서 “부정선거를 조직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알림 공문과 별개로 작성된 회의 결과 공문에는 “정황 증거가 명확한 위반 사실”이라고 명시했다. 문제가 된 경기도건설본부의 조합원은 약 1000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노총 선거관리규정은 민노총 산하 조직에서 선거 중립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투표 역시 선거 규정상 직접, 비밀, 무기명으로 해야 한다. 민노총 내부에선 “내부 선거 관리 규정을 정면으로 어긴 부정선거”란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민노총은 결선 투표를 그대로 진행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일부 후보는 ‘사안이 심각한데 중앙선관위가 단순 경고 조치를 내린 것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민노총은 2012년에도 위원장 선거 과정에서 대의원들의 투표 과정에서 대리·부정 투표가 적발돼 위원장 선거가 취소된 적이 있다.

◇이석기 전 의원의 경기동부연합 소속?

이번 부정선거엔 기호 3번 양경수 후보의 지지 기반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양 후보는 민노총 내 최대 계파인 NL(민족해방) 계열 ‘전국회의’ 소속이고, 그중에서도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속해 있던 ‘경기동부연합’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노조 경기건설지부는 전국회의의 거점 조직으로 전해진다. 이 전 의원은 전쟁 발발 시 북한에 동조해 통신·유류·철도·가스 등 국가 기간 시설을 타격하는 방안을 논의한 혐의 등으로 2013년 구속됐다.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9년이 확정됐고 2022년까지 복역해야 한다.

양 후보는 이 전 의원과 같은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출신이다. 폴란드어과 95학번으로 2001년 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대학 시절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중앙상임위원을 하며 각종 반미 집회에도 참가했다. 수년간 수배 생활도 했다. 이후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양 후보는 선거 토론회에서 “최초의 비정규직 출신 민노총 위원장이 되겠다”고 했다.

양 후보는 현재 이석기 전 의원 석방을 주장하는 경기공동행동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7월 9일에도 경기도청 앞에서 이석기 전 의원의 8·15 특사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유튜브 등에도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조작 사건’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찍는 등 이석기 전 의원을 석방하라는 주장을 계속 펴고 있다.

건설노조 경기도건설지부는 본지의 해명 요청에 대해 “지부 차원으로 선거와 관련된 지침을 내리거나 결정한 사실이 없다”며 “일부 조합원 개인이 지부 명의를 도용한 문제이고, 자체 조사를 통해 재발 방지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양경수 후보 측은 “지침을 내린 바 없고 일부 조합원이 현장에서 과도하게 선거 운동을 진행했다”며 “경기동부연합은 현재 없는 조직이고, 이석기 의원 석방 요구는 민주노총 전체의 공동 입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