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논란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민사고 학생들은 물론이고 졸업생들 사이에서도 논란은 진행 중이다. 재학생과 졸업생 중에서는 이른바 ‘블랙방’이라고 불리는 민사고만의 기숙사 배정 방식이 문제라고 보는 시선이 여럿 존재한다.
2018년 3월 학교폭력위원회에 참석해 두 차례 직접 아들을 변호한 정순신 변호사가 실제로 이 블랙방에 대해 언급했던 기록도 있다. 그는 아들의 주도로 피해학생이 블랙방에 보내졌다는 의혹에 대해서 부인하며 “피해학생을 블랙방에 보내는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정 변호사의 이런 발언은 인과(因果)가 뒤바뀐 해명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제도가 있다는 점을 정 변호사의 아들이 활용한 것이고, 다른 학생들이 특정 동료를 블랙으로 규정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제도가 악용된 것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이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블랙방의 존재는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폭 관련 판결문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판결문에는 수수께끼 같은 발언들이 포함돼 있다. “너는 H랑 어울린다” “너는 H다” “넌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나가라.” 여기서 ‘H’는 ‘학생들이 기피하는 학생’을 지칭하는 약자다. 민사고는 전교생이 기숙생활을 하는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다. 당시 민사고는 기숙사 방 배정 전에 학생들에게 방을 같이 쓰고 싶은 동료와 같이 방을 쓰기를 꺼리는 동료를 각각 최대 3명씩 제출하게 해 방 배정 참고 자료로 사용했다. 학생들은 이를 각각 ‘화이트리스트’ ‘블랙리스트’라고 이름 붙였고, 방을 같이 쓰기를 꺼리는 학생들끼리 모인 방을 ‘블랙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H는 바로 이 ‘블랙’을 지칭한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로부터 피해를 당한 학생은 2017년도 2학기 때 블랙방에 배정되면서 가해학생으로부터 ‘블랙’으로 불리게 됐다.
블랙방 존재, 공공연한 비밀
판결문에 드러난 폭력의 주된 장소는 기숙사다. 기숙형 학교이니만큼 학업과 일상의 경계가 타 학교보다 훨씬 흐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사고 기숙사 건물에는 식당, 면학실이 함께 있다. 학생들이 자습을 하는 공간은 식당, 면학실, 개인의 방 등 기숙사 내부로 한정된다고 한다. 이 기숙사에서 정 변호사 아들은 피해학생을 자신의 방 내지 호에서 내쫓기 위해 ‘블랙’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했다. 민사고 기숙사의 한 호실은 현관을 기준으로 좌우 두 개의 방으로 나뉜다. 한 방을 3명이 같이 쓰고 한 호실에서 총 6명이 생활하는 구조다. 6명이 변기, 샤워실, 세면대를 공용으로 사용하고, 같은 방을 쓰는 학생은 룸메이트, 같은 호실의 다른 방을 쓰는 학생은 호메이트라고 부른다.
민사고 측에 따르면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은 입학 첫 해인 2017년 1학기에는 같은 층의 이웃 호실을 사용했고, 2017년 2학기에는 피해학생이 1층, 가해학생은 4층에 배정되며 뚝 떨어졌다. 민사고 기숙사 1층에는 사감선생님의 방이 위치해 있다. 당시 사감 선생은 방 배정 작업 중 부정적 리스트에 오른 두 명의 학생과 함께 생활할 한 명의 학생을 찾는 과정에서, 피해학생이 두 학생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제출하지 않은 학생 중 한 명이었기에 의견을 타진했다고 한다. 이때 피해학생은 조금 망설이다가 동의했고, 그렇게 이른바 블랙방에 들어가게 됐다. 민사고 측은 “사감실 맞은편 방에 이 세 명을 배정하고 관심 있게 관찰하였더니 한 학기 동안 무난하게 생활했다”고 설명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1학년 2학기 때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을 포함한 무리가 기숙사방을 함께 쓰려고 했다가 피해학생만 무리에서 빠지게 되면서 ‘H’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빨갱이’ ‘돼지’라고 놀려오던 가해학생에게는 피해학생이 블랙방에 들어간 이후 따돌릴 명분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블랙방에 들어간 2017년 2학기부터 피해학생의 정신적 피해는 심해져 12월 이후부터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으며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겨울방학 후 학교에 복귀할 때 가해자와 호메이트가 됐다. 복귀 이후인 2018년 2월경 증세가 악화되어 귀가했고, 정신병원 입원 치료를 받았다. 다른 방이지만 같은 호실에 배정되면서 사실상 한곳에서 생활한 것. 피해자는 결국 3월경에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만위 민사고 교장은 주간조선과 만나 기숙사 방 배정 과정에서 학생들로부터 동료의 호불호를 따지는 ‘리스트’를 분류하는 이유에 대해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전교생이 3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고, 타 학교에 비해 학생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의 정서와 학업에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최관영 민사고 기획부교장은 “성격, 취침시간, 방 온도 선호도, 관심 연구분야, 취미활동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방 배정 제도가 개교 때부터 시행된 것은 아니다. 몇 차례 기숙사 방 배정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정순신 아들 학폭 당시는 이 제도의 과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순신 아들 학폭 사건이 일어난 2017년 당시 남자방의 경우 긍정과 부정 리스트를 3명씩 적어 냈고, 여자방의 경우 랜덤 배정 방식이었다. 한만위 민사고 교장은 기숙사 방 배정을 하면서 학생들로부터 ‘리스트’를 받게 된 건 2015년부터라고 설명했다. ‘랜덤 배정’과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방을 짜는 방식’ 사이 접점을 찾아 지금껏 조금씩 보완해왔다고 한다. 학생들끼리 방을 구성해 오라고 하면 끝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그렇다고 아예 ‘랜덤’으로 구성하면 학생들 사이에서 민주적이지 않다며 반발이 있었다고 했다.
민사고 학생 페이스북 커뮤니티인 ‘민사고 대나무숲’에는 유독 2017년에 ‘블랙리스트’ 관련 글이 자주 올라왔다. “이번에 방 바꿀 때부터 여자 화이트리스트랑 블랙리스트 없어진다는데 사실인가요?” “왜 여자는 화이트리스트가 없고 남자는 있는 거죠.” “룸메 화이트, 블랙리스트 치면서 통수치는 경우 많던데 친구에게 거짓말하지 말고 정직하게 삽시다. 여러 명에게 피해 가잖아요.” 이런 글에서 학생들끼리 블랙리스트로 불리는 방 배정 제도와 관련해서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정순신 아들 학폭 있던 해 유독 논란
방 배정 방식을 개선하자고 제안하는 글도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한 학생은 ‘블랙, 화이트 제도가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글쓴이는 “입학하면서부터 완전한 랜덤으로 방 배정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며 “사실이 아닌 소문에 의해 블랙방에 배정되기도 하고, 블랙방이라는 낙인이 한번 생기면 떨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학생은 “80명 중에 같이 방 쓸 두세 명 구하기 어려운 아이들은 민족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들이 스스로 개선을 해야 한다”는 사감의 발언을 소개하며 문제삼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 글에 댓글을 달면서 블랙리스트 제도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주간조선이 접촉한 복수의 민사고 졸업생들은 방 배정에 대해 기억하는 내용이 모두 조금씩 달랐다. 2017년도 이전에 방 배정을 경험했다는 졸업생 A씨는 1·2학년 때는 랜덤방식, 3학년 때는 자치적으로 6명을 모아가되 리스트를 받는 방식이었다고 기억했다. “민사고는 해외대를 준비하는 국제반과 국내대를 준비하는 국내반이 따로 있는데 1·2학년 때는 대입과 관계없이 랜덤으로 국내반·국제반이 함께 생활했고 3학년 때는 입시 사이클이 달라 따로 방 배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6명이 다 모이지 않아서 남는 인원을 아우르는 경우에 생기기도 하는 것이 블랙방”이라고 설명했다. “3학년 때는 서로 예민한 만큼 리스트를 받는 것에 다들 동의할 것”이라고 전했다.
졸업생 B씨는 “1·2학년 때는 학기마다 랜덤 방 배정, 3학년 때는 고3 편의를 봐주어서 친한 친구들 6명끼리 방을 배정해주었다”며 “기피리스트와 같은 것은 들어본 적 없다”고 설명했다.
정 변호사 아들 사건의 여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민사고는 3년 전부터 부정리스트를 줄여서 받고 있다고 한다. 1학년 때는 MBTI 검사 결과를 기반으로 방 배정을 하고, 2·3학년 때는 긍정·부정 리스트를 기존의 3명에서 2명으로 줄여서 제출하도록 제도를 바꿨다. 부정리스트는 제출 안 해도 무방하나 특별한 경우에는 3명까지도 제출 가능하다. 보통 사감은 아이들 성적, 성향 조합과 리스트를 고려해서 방 배정을 하는데 부정리스트는 최대한 반영하지만 긍정리스트는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배정 후 방 교환요구가 있으면 나머지 구성원의 동의를 받아 교환해주고, 학기 중에도 가끔 갈등이 심해질 경우 방을 변경한다고 한다. 방 배정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학생이 있다면 심리학 선생님이나 기숙사에서 근무하는 전문 상담사가 따로 불러 상담을 진행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한만위 교장 “블랙방 존재하지 않는다”
민사고와 같은 전국단위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는 전국에 10개다. 이 중 민사고처럼 전교생이 기숙생활을 하는 학교도 있다. 서울국제고등학교의 경우 기숙사 방 배정은 랜덤방식이다. 학생이 직접 뽑는 추첨제로 진행한다. 하나고등학교의 경우 방 배정 시 학생의 생활 성향과 교우관계를 조사하는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방을 같이 쓰기 어려운 학생을 묻는 문항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사고 한만위 교장은 블랙방 논란과 관련해 “블랙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부정적 리스트를 적어 내더라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고 최대한 고루고루 섞는다”는 것이다. 그는 “최대한 학생들을 고려한 방 배정 방식”이라고도 했다. “문제점이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제도를 개선해왔고 랜덤 배정 방식보다 ‘리스트’를 제출하는 방식이 순기능이 훨씬 더 크다”고도 했다. 랜덤으로 방을 배정하는 방식이 학생들의 포용력을 길러 주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 안 맞거나 못 견디면 그냥 학교를 나갈 수밖에 없다. 포용력 같은 경우는 수업시간이든 동아리든 다른 다양한 곳에서 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