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서울 반포한강공원 택시승강장 인근에 마련된 고(故) 손정민 씨 추모공간 인근에서 열린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휴대전화기 불을 켜고 있다. 손 씨는 지난 달 24일 반포한강공원에서 술을 마신 뒤 실종됐다가 30일 인근 한강 수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뉴시스

23일 오후 7시 30분. 서울 반포한강공원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 대학생 고(故) 손정민(22)씨의 온·오프라인 추모 집회를 위한 흰색 전광판이 세워졌다. 지난 16일에 이어 2번째 집회다. 손씨는 지난달 25일 이곳에서 실종됐다가, 닷새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주최 측은 아크릴 판으로 손씨 이름의 초성인 ‘ㅅㅈㅁ’ 글자를 만들어 세웠다. 시민 100여 명은 ‘정민아 미안해’ 같은 문구가 적힌 휴대전화 전광판 앱을 켜고 들고 있었다. 이 시각 온라인에서는 손씨를 추모하는 시민 600여 명이 화상 대화 플랫폼에 모여, ‘공개수사’ ‘진실규명’ 같은 문구가 적힌 마스크를 착용하고 집회 생중계를 봤다.

손씨가 사망한지 한 달이 지났지만, 전국 각지에서 손씨를 추모하는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날 오후 2시에는 카카오톡 오픈대화방을 통해 정보를 공유한 150여 명의 추모객이 이곳에 제각각 모였고, 일부 시민은 집회가 끝난 오후 9시까지도 자리를 지켰다.

강원도, 인천, 경기도 등에서 모인 이들은 한결같이 “손씨 사인을 명확히 밝히라”고 했다. 집회 현장에서 즉흥으로 이뤄진 자유발언에서는 “손씨 부모가 일상으로 돌아가야 우리도 돌아갈 수 있다”(50대 여성)는 말이 나왔다. 이들은 왜 타인의 죽음에 이토록 분노하는 걸까.

23일 오후 서울 반포한강공원 택시승강장 인근에 마련된 고(故) 손정민 씨 추모공간 인근에서 열린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휴대전화기 불을 켜고 앞에는 손 씨의 초성 ㅅ, ㅈ, ㅁ에 추모 촛불이 놓이고 메시지가 적힌 메모지가 붙여져 있다. /뉴시스

◇내 자식이 당한다면? “단순 실종 아닌듯”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내 자식' 잃은 것 같아 나왔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도 일산에서 온 김환기(56)씨는 “내 아들이 정민이랑 비슷한 나이다”며 “자식 잃은 아비 마음이 어떨까, 나라도 나와서 손씨 아버지를 위로해 주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서울 서초구에 거주하는 김모(74)씨도 “재수를 하고 있는 손주가 한 명 있다”며 “우리 손주를 잃은 것 같아서 가슴이 찢어진다. 그리 먼 걸음도 아닌데 추모라도 해야 제 아버지 두고 가는 정민이 발걸음도 떨어질 것 아니냐”고 했다.

집회 현장에 처음 나와본다는 시민들이 많았다. 정치색 없이 추모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번 집회 주최 계획을 경찰에 신고한 2명도 20대 청년으로, 이 중 1명은 대학생이다. 주최자 A(24)씨는 “추모 집회가 정치적으로 변질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집회를 기획했다”며 “부모님 세대뿐 아니라 청년들도 주의깊게 본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집회에 참가한 이들 중에는 손씨의 죽음이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닌 ‘권력이 덮은 죽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손씨 부모에 공감하는 50~60대 연령층이 주축이 됐다. 경기도 안산에서 낮 11시부터 버스를 타고 왔다는 황모(65)씨는 ‘서초 경찰은 정민이 사인을 명명백백히 밝히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그는 “내 자식이 이렇게 됐는데, 경찰 수사가 제대로 안 된다고 생각을 해 보라”며 “부모 심정을 생각하면 내겐 ‘세월호 사건’ 만큼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이어 “정부는 국민청원을 왜 빨리 공개하지 않는 것이냐. 억울한 청년 죽음에 침묵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24일 오전 기준 손씨 사망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물은 44만8000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국민청원은 사전동의 100명 이상이 되면 일시적으로 비공개 처리가 되고 관리자가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데, 정부가 검토에 지나치게 시간을 끈다는 것이다.

23일 오후 서울 반포한강공원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열린 고(故) 손정민씨 추모 집회에서 시민들이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권력 불신, “정부·경찰 수사 못 믿겠다”

경찰이 한 달째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수사에 대한 불신(不信)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1차 집회에도 참석했다는 인근 주민 B(53)씨는 “물 속으로 들어가면 밑이 뻘이라 평영은 커녕 걷지도 못 한다는 것을 여기 사는 사람은 다 안다”며 “경찰이 지금 제일 문제”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서초경찰서 강력 7개팀을 모두 투입해 수사를 이어오고 있다. 손씨 실종 당일 목격자 7명을 추가로 확보했고, ‘불상의 남성이 평영을 하며 강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 진술도 지난 18일 공개했다. 목격자들에 대한 최면 조사도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이날 일부 시민들은 손씨와 함께 술을 마신 친구가 누워 있던 장소에 모여, 경찰 수사 결과를 믿기 어렵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나눴다. “낚시를 하던 목격자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냐” “경찰 발표를 믿을 수가 없다” “자기 주량이 있는데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실 수가 있느냐” 같은 내용이었다. 추모 공간에도 ‘청와대는 경찰 수사에 엄정 대처하라’ ‘특검을 도입하라’ ‘썩은 나라’ 같은 내용의 손팻말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일부는 유튜브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루머를 언급하기도 했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장모(51)씨는 “손씨의 ‘혈흔’에 대해서는 왜 언급이 없느냐”고 했다. 지난 1주 간 일부 유튜버들은 국내 뉴스가 아닌 외국어 버전 뉴스에만 보도됐다며 ‘손씨가 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바닥에서 다량의 혈흔이 발견됐다’ 등 의혹을 제기했다. 모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국과수는 손씨의 사인이 익사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내놓은 상태다. 서초경찰서는 손씨의 사망 경위에 대해 허위 사실을 유포한 유튜버·네티즌을 상대로 위법 여부 법리 검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오후 서울 반포한강공원 택시승강장 인근에 마련된 고(故) 손정민 씨 추모공간 인근에서 열린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휴대전화기 불을 켜고 있다. 손 씨는 지난 달 24일 반포한강공원에서 술을 마신 뒤 실종됐다가 30일 인근 한강 수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뉴시스

◇전문가, “한강공원 상징성이 동질감 불렀다”

전문가들은 한강공원이 가진 상징성과 공간의 특징이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승재현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껏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장소에 제대로 된 폐쇄회로(CC)TV도 없고, 결국 목격자 진술에 의지하고 있지 않느냐”며 “당장 내가 실종되더라도 국민적 관심이 없으면 나의 실종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데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오보나 추측성 기사가 나가면 즉각 해명을 해 주는 것도 필요한데, 일부 유튜버가 돈벌이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는데도 (경찰의) 구체적인 설명이 다소 늦어진 감이 있다”며 “그러면서 그간 쌓아온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터져나온 것”이라고 했다.

경찰청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 제5조에 따르면,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로 인하여 사건관계자의 권익이 침해되었거나, 침해될 우려가 있는 경우’ 경찰은 수사사건 등의 내용을 공개할 수 있다.

한편 경찰은 23일 손씨와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를 불러 7번째 조사를 마쳤다. 경찰은 손씨가 숨질 당시 신고 있었던 양말에서 채취한 토양 성분과 한강 변 잔디밭·수면 아래 흙 성분 등의 비교 분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