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학원에서 배포한 수능시험 분석지. 입시 위주로 중고생들의 국어수업이 집중되면서 청소년들의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 송모양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소설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대신 학원 강사가 수능과 모의고사에 자주 출제되는 근현대 소설, 고전 문학의 주요 대목을 발췌해 1쪽으로 요점 정리한 교재를 달달 외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교재에는 ‘난장이=소외 계층, 거인=기득권층, 대립 구조만 암기하면 됨’이라고 필기하며 공부하는 식이다. 최인훈의 ‘광장’은 ‘개인의 자유(밀실)와 공동체가 우선되는 공간(광장) 간 불균형이 핵심’이라고 외운다. 송양은 “책을 다 읽는다고 수능에서 더 좋은 점수를 받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 시간에 기출 문제를 한 문제라도 더 푸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한국 학생들이 입시 위주 교육에 매몰되면서 문해력을 키우는 독서와는 멀어지고 있다. 학교 내신 시험과 수능에서 고득점을 올리기 위해선 천천히 글을 읽고 의미를 곱씹어선 안 되고, 정해진 시간 내 정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훈련을 반복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학교 국어 수업에서도 책을 깊이 읽을 기회가 없다. 치열한 대입 경쟁 속에 공정성을 이유로 객관식 위주 평가를 진행한 결과다.

그래픽=박상훈

이는 문학 작품을 읽고 장문의 에세이를 쓰는 미국의 교육 현장과는 180도 다르다. 본지가 한국과 미국의 중·고교생들을 인터뷰해보니 미국 학생들은 대부분 학기마다 문학 작품을 많으면 10여 권씩 읽는 반면 한국 학생은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서도 독서 장애 요인으로 ‘공부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30.4%)를 꼽은 학생이 가장 많았다.

김혜정 경북대 교수(국어교육과)는 “수능과 내신 시험은 국어 지문을 모두 다 이해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다 풀긴 어렵다”면서 “평가 제도 개선 없이는 문해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80분에 45문제 ‘시간 싸움’… 지문도 다 안읽고 정답 찾기만 매달려

강원도 한 고등학교 3학년 김모양은 최근 인강(인터넷 강의) 국어 수업에서 ‘논리학’을 주제로 한 1700자 분량의 비문학 지문을 배웠다. 지문을 끝까지 읽지 않고 강사 설명에 따라 접속사엔 ‘세모’, 핵심 용어엔 ‘동그라미’, 예시에는 ‘물결’ 표시를 했다. 김양은 “수능이나 내신 문제를 풀기 위해 꼭 필요한 단서를 지문에서 찾는 훈련을 하는 것”이라며 “선생님도 ‘역접 접속사를 찾아서 전개가 전환되는 지점을 빨리 찾아라’고 하는 등 국어 지문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김양뿐 아니라 우리나라 학생들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한 ‘깊이 읽기’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글을 읽는다. 가장 큰 이유는 수능이 정해진 시간 내 많은 객관식 문제를 푸는 ‘스피드 테스트’이기 때문이다. 현행 수능 국어는 80분 동안 45문제를 풀어야 한다. 지문 읽는 시간을 감안하면 한 문제당 1분 47초 내에 풀어야 한다. 글을 차분하게 읽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지문 속에서 답을 맞히는 데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찾는 훈련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한 고등학생은 “하루 2000자 가까운 지문을 5개 넘게 볼 정도로 평소 글은 많이 읽는 것 같은데, 문제집을 덮고 나면 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사는 고3 박모양은 이번 학기 학교 문학 수업에서 고려 속요 ‘정석가’를 배웠다. 그런데 전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교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을 형광펜으로 색칠하고 그 부분만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평소 학생들의 독서 수준과는 달리 수능 국어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개념들이 출제되면서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해 수능 국어에서 대학 교수들조차 난해하다고 했던 ‘칸트’ 문제가 대표적이다.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는 “짧은 시간 내에 글을 읽고 답을 찾는 기술을 배우는 건 아이들의 문해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칸트 관련 지문처럼 지나치게 현학적인 지문을 낼수록 마음이 급한 학생들은 책을 열심히 읽으려 하기보다 사교육에서 국어 문제 푸는 기술만 익히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들도 적다. 경기도교육청이 초·중·고 학생 3700여명을 조사해 지난해 발표한 ‘학생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학생들이 책을 가장 많이 접하는 곳은 학교 도서관(60.5%)이었다. 그런데 정작 도서관 이용 빈도는 크게 떨어진다. 학교 도서관을 얼마나 자주 이용하느냐고 물었더니 ‘이용하지 않는다(19.2%)’는 학생이 가장 많았고, 이어 월 1회(17.1%), 주 1회(16.2%), 연 4회 미만(15.5%) 순이었다.

한 고등학교 국어 교사는 “수행 평가로 원하는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과제를 내줬는데 책을 실제 다 읽은 학생은 1명도 없더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고 글을 써본 적이 적기 때문에 과제도 인공지능(AI)에 맡겨서 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