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에서 다섯 살 딸을 키우는 A씨는 ‘대치동 영어 조기 교육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 영어 유치원 입학에 필요한 ‘4세 고시’ 준비를 위해 아이를 두 돌이 되기 전부터 영어 학원에 보냈다. 목표한 영어 유치원에 들어갔지만, 아이가 작년부터 영어뿐 아니라 한국어도 헷갈려 하며 아예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소아 정신과에서 ‘함묵증’ 진단을 받았다. 두 언어에 노출되면서 모국어 혼동이 왔고, 스트레스를 받아서라고 한다. A씨는 “유치원 때 영어를 끝내고 빨리 수학을 시작하려던 욕심에 아이에게 죄를 지었다”며 “다행히 지금은 집 근처 놀이·독서 중심 유치원에 다니면서 아이 상태가 호전됐다”고 했다.
언어·교육학계에선 출생부터 초1까지를 ‘문해력의 뿌리’가 형성되는 시기로 본다. 말소리 단위를 인식할 뿐 아니라, 이를 체계적으로 글자와 연결해 글을 만드는 능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또 이 시기에 책을 놀이처럼 접하고, 부모와 함께 그림책·동화책을 읽는 즐거운 경험을 하면서 문해력의 싹이 트는 것이다. 그런 만큼 ‘4세·7세 고시’ 등 한국의 조기 교육 과열 열풍은 이를 막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손혜숙 경인여대 유아교육학과 교수는 “외국어 학습 시작은 측두엽(언어·기억)이 발달하는 7세 이후를 권장한다”며 “지나친 영어 조기 교육으로 한국어 습득이 늦어지면 문해력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인 교육 기회도 놓치게 된다”고 했다.
◇ABC 먼저 배우는 아이들… “만들기 할까” 한국말을 못 알아들었다
육아정책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은 5세 아이의 84.2%가 평균 2.29개의 사교육에 참여(2024년 기준)할 만큼 조기 교육이 과열돼 있다. 사교육을 받는 2세도 51%에 달한다.
본지가 한국교총과 함께 국공립 유치원 교사 133명을 설문한 결과, ‘학습 위주 조기 사교육이 문해력 발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49.6%가 ‘매우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방해되는 편’(41.4%)이란 응답까지 감안하면, 교원 10명 중 9명 이상은 학습 위주 조기 교육이 문해력에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중복 응답)로 교사들은 ‘발달 단계에 맞지 않는 학습으로 인지 과부하’(73.7%), ‘주입식 교육으로 자기 주도적 사고 능력 저하’(49.6%), ‘모국어 노출 기회 감소’(29.3%), ‘시간 부족으로 부모와 책 읽기 기회 감소’(13.5%) 등을 꼽았다.
경기 의정부에 사는 학부모 B씨는 작년 말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다섯 살 딸이 ‘틱’(특별한 이유 없이 신체를 빠르게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증상)을 보여 병원을 찾았다. 영어 유치원이 아이들에게 영작을 시키고 발표를 하게 했는데, 딸도 발표를 하면서 틱 증상이 시작됐다. 조기 사교육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게 원인이었다.
소아청소년과나 언어치료센터에는 B씨 딸과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김영훈 의정부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생후 36개월 이전에 모국어 기초가 형성되는데, 이는 일상에서 어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만들어진다. 영어 유치원에 다니면서 암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며 “억지로 영어를 주입하면 되레 모국어 기반이 흔들려 향후 학습에 필요한 문해력 형성에 악영향을 준다”고 했다.
유아 교육 현장에서도 영어 조기 교육 열풍의 부작용이 많다고 한다. 서울 목동의 한 유치원 교사는 “영어 유치원 입학을 위한 어학원을 다녔던 아이들이 ‘만들기를 해보자’ 같은 한국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일과 진행이 안 될 정도”라면서 “가정에서 부모와 상호작용으로 키워야 할 기초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도 많다”고 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아동 2150명을 대상으로 한 ‘영유아기 사교육 경험과 발달에 관한 연구(2024)’에 따르면, 3~5세 때 사교육 경험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언어 발달과 문제 해결력, 행동 조절, 계획 능력에 영향이 없고 이후 장기적인 학업 능력에도 유의미한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영어 유치원 같은 학습 사교육은 자아 존중감이나 삶의 만족도 등 정서적 측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문가들은 영유아 때 학습·암기 위주 교육을 흥미 위주의 독서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영유아 시절의 즐거운 독서 경험은 향후 뇌 발달과 인지 능력에서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이 만 9~13세 1만24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즐거움을 위한 조기 독서(2023)’ 연구에 따르면, 일찍이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뇌의 측두엽·전두엽이 일찍 발달했고, 인지·학습 능력이 높았다. 이에 반해 주의력 결핍과 ADHD 증상 등 정신 건강 문제는 적었다.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이용 시간도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영유아기 독서 경험이 3년 이상인 ‘조기 독서’ 그룹에 속한 학생은 독서 경험 0~2.5년인 그룹에 비해 인지 능력은 약 12% 앞섰고, 주중 스마트폰 등 노출 시간은 30%가량 적었다.
국내에서도 어릴 때 부모가 책을 많이 읽어줄수록 학교에 들어가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25년 초·중·고교생 2486명을 대상으로 독서 실태를 조사했더니, 연간 21권 이상 독서를 한 학생의 64.6%는 “어릴 때 부모가 책을 며칠에 한 번, 또는 거의 매일 읽어줬다”고 답했다. 반면 독서를 전혀 안 하는 학생들은 34.8%만 “부모가 책을 자주 읽어줬다”고 답했다고 한다.
교육 당국도 어린 시절 책과 접하는 기회를 늘려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서울교육청은 올해 책 읽기가 중심이 되는 ‘독서 유치원’을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교육 효과가 입증된 ‘조기 독서’ 문화를 확산해 4·7세 고시 열풍을 막아보자는 취지다. 유치원 일과에 책 읽기 시간을 포함하고 아이들이 책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학부모들이 유치원에 찾아가 구연동화·책놀이·토론활동을 진행하는 프로그램 등을 준비할 예정이다.
이재연 한국독서심리전문가협회장은 “영유아는 부모가 독서하는 모습을 모델로 삼아 흉내내고, 책 내용을 부모와 이야기하면서 글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식 등을 습득하게 된다”며 “영유아 독서 교육의 핵심이 결국 가정환경인 만큼, 부모부터 책에 관심을 갖고 아이가 책과 친해지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