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주요 학술 분야에서 연구 발표 건수는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데 비해 논문 인용이 높은 ‘최상위 연구자’ 비율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에 근접한 이른바 ‘A급 과학자’ 규모에서 선진국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본지가 세계적 학술 출판사 엘스비어에 의뢰해 세계 최대 색인·인용 데이터베이스인 스코퍼스(Scopus)에 등재된 논문을 분석한 결과 한국은 ‘세계 상위 2% 연구자’가 지난해 2633명으로 15위를 기록했다. 1위 미국(8만7860명), 2위 영국(2만573명)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격차가 크고, 3위 중국(1만2374명)의 20%, 6위 일본(8730명)의 30%에 불과한 규모다. 13위 스웨덴(3471명), 14위 인도(3372명)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난다.
‘전 세계 상위 2% 연구자’는 20개 학문 분야별로 1996년부터 2024년까지 발표된 논문의 피인용 수와 H인덱스(논문 수, 피인용 수 등을 종합해 학문 역량을 나타낸 지표) 등을 종합해 연구자의 순위를 매긴 것이다. 분야별로 세계적 영향력 있는 논문을 많이 쓸수록 상위권에 오르게 된다. 20개 학문 분야 중 15개가 과학·기술 영역이기 때문에 국가별 과학 연구 경쟁력을 보여주는 지표로도 활용된다.
조사 결과, 한국은 반도체 등 국가 주력 산업과 관련된 응용 분야에선 상위 2% 연구자 순위가 높게 나왔다. 예컨대, 반도체·이차전지 등 ‘첨단·전략 기술’ 분야의 상위 2% 연구자는 591명으로 세계 7위를 기록했다. 첨단 소재와 에너지·의약 연구를 포함하는 ‘화학’ 분야는 11위(316명), 인공지능(AI), 디지털 전환 등이 해당하는 ‘정보·통신 기술(ICT)’ 분야는 13위(268명)를 기록했다. 이 분야들은 한국의 전체 논문 출판 수(13위)를 상회하는 연구 실적을 냈다. 모두 우리 경제의 축으로, 기업의 집중적인 투자가 우수한 연구 성과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물리·생명공학 등 기초 과학 분야에선 우수 과학자를 상대적으로 많이 길러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리·천문학 분야에서 한국은 상위 2% 우수 연구자가 248명으로 16위였다. 생물학은 25위(38명), 임상의학은 19위(506명)에 그쳤다. 수학·통계 분야에선 20위(24명)를 기록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학계에선 국가 R&D(연구개발) 예산의 불균형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R&D 예산 비율(4.96%)이 세계 2위로 높다. 하지만 과학기술정통부에 따르면 당장 상용화가 가능한 반도체 등 ‘응용·개발 연구’에 예산의 85%가 집중됐고, 물리, 수학 등 기초 과학 연구 지원은 15%에 불과하다. 기초 연구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힘들어 기업보다 정부 지원 사업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데, 국가 사업은 매년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목표에 비해 성과가 미흡하면 연구비가 삭감되거나 지원 기간이 줄어든다.
강승구 성균관대 교수(나노공학과)는 “당장 가시적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응용 분야에선 대학과 대기업 간 공동 연구가 활발한 반면 꾸준한 연구비 지원이 필요한 기초 과학 분야에선 그렇지 못해 우수 논문이 나오기 힘들다”며 “AI, 신소재 등 유행에 따라 특정 학문에 기업, 정부 연구비가 집중되는 쏠림 현상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역, 학교에 따라 우수 연구자 보유 규모 차이도 크다. ‘상위 2% 연구자’의 39%(1019명)가 서울대, 카이스트, 연세대, 성균관대, 고려대 등 5개 대학에 집중됐다. 이 대학들은 전년 대비 평균 13% 이상 상위 2% 연구자 수가 증가했다. 반면 지방 대학은 상위 2% 연구자가 줄어든 곳이 많았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은 지난해 우수 연구자가 전년 대비 11.5% 줄었고, 인하대와 전북대도 각각 8.5%, 5.1%씩 감소했다. 최근 우수 연구자들이 수도권 대학으로 옮겨가는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 지방 공대 학과장은 “20~30대 신진 연구자들이 사이언스 등 SCI급 학술지에 논문을 낸 이후 서울 지역 상위권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한국 과학 기술 연구 경쟁력을 위해선 다양한 대학, 연구 기관에서 우수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여건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