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학병원 출신 내과의 김모씨는 2024년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군 전문연구요원’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전문연구요원은 3년 동안 대학 병원이나 바이오 기업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군 복무를 대체하는 병역 특례 제도다. 김씨는 학부생 때 시작한 항암 연구를 계속해서 ‘의사과학자’가 되려 했지만 그해 정부에서 내과 등 6개 과목 전공의들의 전문연구요원 편입을 막는 바람에 사실상 강제로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군 입대 이후 2년 가까이 연구가 중단된 그는 최근 주변에 “의사과학자 꿈을 포기하고 피부과 같은 미용 분야로 진로를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병역 문제로 연구가 중단돼 의사과학자의 꿈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의사과학자는 의사 면허는 갖되 환자 진료가 아니라 새로운 의료 기술, 신약, 첨단 의료 장비 개발 등을 하는 연구자를 말한다. 전공의(인턴·레지던트) 과정 이후 군의관으로 가는 다른 임상의와 달리 의사과학자를 목표로 하는 경우 전문 연구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제대 후 병원·대학에서 연구자로 활동하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국방부가 4~5년 전부터 ‘군의관 부족’을 이유로 이들 상당수를 군의관으로 뽑아가기 시작하면서 이런 길이 막혔다. 매년 1500명가량 들어오던 군의관은 최근 들어 600~700명으로 반 토막 난 것으로 알려졌다. 38개월 복무하는 군의관 대신 18개월 현역 입대를 선택하는 이들이 늘었는데, 이런 분위기가 2024년 의정 사태 이후 심해졌다는 분석이다.
병무청은 매년 7~8월에 의대가 있는 전국 40개 대학에 부족한 군의관의 전공 분야를 공지하고 해당 분야 전공의는 전문 연구 요원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처음에는 전문 연구 요원 응시 제한 분야가 정신건강의학과, 예방의학과 등 일부 과목이었는데 올해에는 외과, 가정의학과 등 12개 과목으로 확대됐다. 사실상 모든 의사과학자가 전문 연구 요원이 되는 길이 끊긴 것이다.
과학기술계는 의사과학자에 대한 군의관 차출을 두고 “기초 과학 분야 연구 인재 육성을 가로막는 행위”라고 반발하고 있다. 매년 3000여 명의 국내 의대 졸업자 가운데 의사과학자는 30명 안팎에 불과한데, 이들마저 군 입대로 연구 활동이 끊기면 연구자를 길러내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주장이다. 의사과학자는 전공의 과정과 대학원 연구를 병행하며 석사 학위를 딴 뒤 전문 연구 요원 활동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민구 연세대 의대 교수는 “의학 연구는 밤새 연구실에서 동물 실험 등 결과 데이터를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군의관으로 입대하면 연구 활동을 이어가는 게 매우 어렵다”며 “군의관으로 가면 제대 후 다시 박사 과정을 밟아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의사과학자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 9월 전공의 과정 진입을 앞둔 서울대병원 박준석(27)씨도 이런 점을 우려하고 있다. 박씨는 2024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위고비 등 비만 치료제가 체중을 줄이는 원리를 세계 최초로 규명한 연구 논문의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박씨는 전공의 과정이 끝나는 3년 뒤 박사 과정 전문연구요원으로 편입해 이 연구를 발전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재 정부 방침대로라면 박씨도 군의관으로 입대할 수밖에 없다. 박씨는 “의대 선배들이 군 입대로 연구를 못 하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의사과학자가 되지 못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의료 현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정부의 ‘의사과학자 육성’ 정책 방향과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부터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 사업을 통해 의사과학자 지망 의대생은 학부 시절부터 연구활동에 참여하게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 장학금과 연구비를 주고 있다. 2023년에는 의사과학자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정부 연구비 지원 기간을 기존 2년에서 11년까지 늘리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5일 ‘미래 과학자와 대화’ 행사에서 연구 활동 중단 문제를 언급하며 ‘기초 과학 분야 병역 특례를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국방부 측은 “군 의료 자원 수급이 최우선이고, 의사과학자에 대한 군의관 선발은 법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최형진 서울대 의대 교수는 “과학 인재를 모두 군으로 보내는 게 당장 인력 확보라는 급한 불을 끄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미래 국가 발전의 씨앗을 없애는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의사과학자(MD-PhD)
의사 면허를 가진 과학자다. 의료 학문 지식과 환자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신약 개발, 바이오 혁신, 감염병 대응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다. 병원 진료를 주로 하는 임상의와 달리 학부 때부터 기초 연구에 참여하는 등 별도 교육 과정을 거친다. 국내에선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의사과학자 양성사업’을 운영하는 일부 대학 중심으로 육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