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열린 법학전문대학원 공동입시설명회를 찾은 학생들이 입학상담을 받고 있다. /뉴스1

서울의 한 사립대는 최근 인문·사회 계열 학과 학생들의 ‘학점 민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대학은 A학점 이상(A 또는 A+) 비율을 40%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자 인문·사회 학과 학생 위주로 “다른 대학은 A학점을 퍼주는데 우리 대학만 학점이 낮아 로스쿨 진학과 취업에서 불이익을 본다”고 불만을 쏟아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대학 측은 인문·사회 계열 학과 교수들과 평가 방식을 두고 토론까지 벌였다. 이 대학 교무처장은 “학생들 요구에 지쳐 일부 교수들도 ‘A학점을 늘리자’고 하더라”며 “‘학점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어렵지만 질 높은 강의’는 외면받고 건강한 학습 경쟁 문화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인문·사회 계열 학과의 ‘학점 인플레 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기간 많은 대학이 온라인 수업으로 평가가 어렵다는 이유로 절대평가를 적용하거나 학과·교수가 A 학점 비율을 자율적으로 정하게 하면서 학점 인플레가 확산됐는데, 최근 로스쿨 진학 희망자가 급증하며 더 심해진 분위기다.

그래픽=김현국

25일 본지가 서울 주요 대학 6곳의 2024학년도 2학기 전공 학점을 분석한 결과 인문·사회 계열 학과의 A 학점 이상 비율이 공학·자연 계열 학과보다 20%포인트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는 인문대학 학생 2975명 중 1932명(65%), 사회과학대학 3840명 중 2296명(60%)이 A 학점 이상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류학과(76.3%), 정치외교학부 정치학(75.9%), 영어영문학과(73.7%) 등 10명 중 7명 넘게 A 학점 이상인 학과도 많았다. 반면 서울대 공과대학은 40%, 자연과학대학은 43.1% 등 이공계열 학과는 A 학점 비율이 40% 안팎이었다.

다른 대학도 인문·사회 계열 학과를 위주로 학점 인플레가 심했다. 연세대 문과대학은 61.9%, 사회과학대학은 57.8%가 A학점 이상을 받았다. 반면 공과대학은 41.2%, 이과대학은 39.4%였다. 고려대 역시 문과대학 68.5%, 미디어학부 67.9%, 성균관대는 사회과학대학 67.4%, 문과대학 62.2%가 A학점 이상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인문·사회 계열 학과 학점 인플레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취업난에 로스쿨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이 많아진 것을 꼽는다. 로스쿨 지원자는 2016학년도 8246명에서 2026학년도 1만9057명으로 10년 사이 두 배 넘게 늘어났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 로스쿨은 입시에서 학점 실질 반영 비율이 20~40% 선으로, 학생들은 평균 A학점 이상을 받지 못하면 로스쿨에 못 간다고 인식하고 있다. 서울 한 사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울대부터 학점을 퍼주니까 다른 대학들은 학생들이 취업에서 불이익을 볼까 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격한 학풍으로 상대평가를 고집하던 서강대도 작년 2학기부터 A 학점 최대 비율을 30%에서 40%로 늘리고 일부 교양 수업에는 절대평가도 도입했다. 학점이 낮아 로스쿨 진학에 불리하다는 학생들 요구가 평가 방식을 바꾼 계기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강사 등 비전임 교원의 비율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학생의 강의 평가가 재계약에 큰 영향을 주다 보니 신분이 안정된 전임 교수보다 상대적으로 학점을 높게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꿀강의’만 선택하고, 선택받지 못한 강의는 결국 폐강되는 악순환 때문에 학점 인플레가 심각해지고 있다”면서 “대학이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차원에서 강의별 학습량과 난이도를 비슷하게 맞추도록 가이드라인을 내는 등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