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경기 성남에 있는 가천대 스타트업칼리지. 후드티를 입은 앳된 고등학생들이 무대 위에서 팬데믹 바이러스 검출, 포뮬러원(F1) 머신 설계, 맞춤형 화장품 개발 등 밤새 준비한 창업 계획을 발표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목승환 서울대기술지주 대표, 문여정 IMM인베스트먼트 전무 등 벤처 투자 업계를 대표하는 심사위원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사업 구상에 대해 막힘 없이 설명했다. 한 심사위원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고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최신 인공지능(AI) 기술에 대한 이해도 뛰어났다”고 했다.

이 행사는 전국 8개 과학영재고 소속 학생 43명이 지난 15일부터 사흘간 참가한 ‘대한민국 과학영재 창업캠프.’ 2022년 가천대에 창업 학교인 ‘스타트업칼리지’를 출범한 장대익 학장이 AI 등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과학 창업가’를 양성하고자 전국 영재고 교장들과 의기투합해 마련한 행사다. 대학에서 영재고 학생들을 모아 창업 캠프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꿈꾸는 창업은…” 16일 경기 성남 가천대 글로벌캠퍼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과학영재고 창업 캠프’ 참가자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 이 캠프에서 전국 8개 과학영재고 소속 학생 43명이 직접 창업 계획을 짜보는 등 다양한 과제를 수행했다. /박성원 기자

과학 영재들은 캠프 첫날에는 가천대 교수·학부생들에게 챗GPT보다 성능이 고도화된 과학 연구자용 AI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 뒤 관련 영문 논문 3편을 분석했다. 이튿날에는 ‘차세대 AI 기술 기반 창업’을 주제로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발표하는 최종 과제가 주어졌다. 총 9개 조로 나뉜 참가자들은 현재 스타트업을 운영하거나 준비 중인 대학생 멘토와 함께 밤새 창업 계획을 구상했다. 캠프에는 중학교 시절 모바일 앱을 만들거나 각종 발명 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평소 창업에 관심이 높았던 학생들이 다수 참가했다. 한 참가자는 “나뿐 아니라 많은 학생이 입시 학원 일정을 미루고 창업의 기초를 배우기 위해 캠프에 참가했다”고 전했다.

교육계에선 이 캠프에 참여한 학생들처럼 영재고에서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창업’을 꿈꾸는 학생이 늘고 있는 것을 긍정적인 변화로 평가했다. 영재고는 이공계 분야 창의 인재를 집중 육성하기 위해 2006년 본격 도입됐지만, 공대에 진학한 이후 자퇴하고 의대로 진로를 바꾸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최근 5년간 의대에 진학한 영재고 출신 학생이 1058명에 달할 정도였다.

본지가 캠프 기간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대부분의 응답자(97%)가 “공학·자연계열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했고, 82.4%는 “앞으로 10년 안에 창업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문제는 의대 대신 창업을 꿈꾸는 학생이 조금씩 늘고 있지만 상당수가 국내보다 해외를 무대로 꿈꾼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디서 창업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64%가 ‘미국 실리콘밸리’라고 답했다. 국내 창업을 희망한 응답자는 36%였다. 한 참가자는 “각종 지원이 열악한 한국보다 오픈AI를 비롯해 현재 글로벌 혁신을 주도하는 미국에서 뛰어난 인재들과 경쟁하고 싶다”고 했다.

‘AI로 창업하고 싶은 분야’를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 40%가 ‘자율 주행차 등 미래 교통’을 꼽았고 ’바이오·신소재‘ ’영화·음악‘이 각각 16%로 뒤를 이었다. 국내외 창업가 중 롤 모델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는 40%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를 꼽았다. 한 학생은 “남다른 비전과 추진력으로 사업을 성공시킨 머스크의 혁신적인 리더십을 본받고 싶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 외에도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 오픈AI 창업자 샘 올트먼, 국내에선 장병규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 이승건 토스 대표 등을 롤 모델로 들었다.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 1학년 김건호 군은 “일단 학교는 최우선적으로 입시 준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창업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학교에서 관련 경험을 쌓거나 전문 지식을 얻는 게 어렵다”며 “영재고를 비롯해 과학기술을 배우는 많은 학생들이 계속 창업의 꿈을 키우고, 실제로 나중에 도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창업 교육 프로그램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천대와 전국 8개 영재학교는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에 매년 창업 캠프를 이어갈 계획이다. 장대익 학장은 “한국은 미국 CES에서 각종 혁신상을 휩쓸고 있지만 애플, 구글처럼 판을 뒤엎는 혁신 사례는 잘 나오지 않는다”며 “공부만 열심히 해선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에 학생들에게 새로운 혁신을 일궈낼 수 있는 창업 마인드를 길러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