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이 어렵다는 이유로 외면받던 철학·언어학 등 인문계 학과의 입학 경쟁률이 오르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 고유 사고력과 문해력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분석이다.

5일 교육계에 따르면, 서울대 철학과 경쟁률(수시)은 2020학년도 9.92대 1에서 2026학년도 15.56대 1로 올랐다. 같은 기간 언어학과는 6.9대 1에서 9대 1로, 종교학과는 6.7대 1에서 15.33대 1로, 미학과는 7.2대 1에서 12.56대 1로 상승했다. 고려대는 철학과 경쟁률(정시)이 2020학년도 3.73대 1에서 2026학년도 5.27대 1로, 언어학과는 이 기간 4.57대 1에서 6.5대 1로 올랐다.

그래픽=백형선

경북대에선 2026학년도 정시 철학과 경쟁률(15.6대 1)이 전체 학과 중 가장 높았다. 권홍우 경북대 철학과 교수는 “사유(思惟)하는 힘을 기르는 게 미래에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학생이 많아지며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다.

구글 등 빅테크들이 AI 개발에 필요한 NLP(자연어 처리) 업무를 위해 언어학 등 인문학 전공자를 채용하는 것 역시 영향을 줬다는 해석도 있다.

◇“철학, AI시대 논리력 키우는데 유용”

교육계에선 “AI가 일자리를 대체하는 불확실한 미래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면서, 수험생들의 학과 선택에도 이 같은 변화가 생겼다”고 보고 있다. 과거 대기업과 금융권으로 가려고 학생들이 몰렸던 경영학과는 경쟁률이 최근 주춤하고 있다. AI가 개발자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컴퓨터공학과도 상황이 비슷하다. 서울대에선 컴퓨터공학부 경쟁률(수시)이 2023학년도 8.86대 1까지 올랐다가 감소세를 보이기 시작해 2026학년도 4.31대 1까지 떨어졌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미래에 필요한 사고력을 기를 수 있을 뿐 아니라, 합격 커트라인이 상대적으로 낮아 ‘대학 간판’ 업그레이드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철학과·언어학 등 인문계 학과를 택하는 수험생이 많아졌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로스쿨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의 증가도 힘을 보탰다. 법학적성시험(LEET)을 준비하거나 로스쿨 교육 과정의 핵심인 문해력과 사고력을 기르는 데 철학·언어학 수업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권영우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LEET에 필요한 논리·추론·독해력을 훈련할 수 있어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고 했다.

테크 기업들이 AI 개발에 필요한 언어학 등 인문학 전공자를 채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유망한 AI 기업들이 인문학도의 손에서 탄생한 사실이 최근 알려진 것도 한몫했다. 미국 AI 기업 ‘팔란티어’ 창업자인 알렉스 카프는 철학을, 국내 생성형 AI 스타트업 ‘뤼튼’의 창업자인 이세영 대표는 문헌정보학과를 전공했다. 지난해 경영학과와 철학과에 모두 합격했지만, 철학과를 택한 경북대 1학년 김모(20)씨는 “먼저 철학을 공부하고 경영은 (나중에) 복수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며 “챗GPT를 접하면서 미래엔 인간의 사고력과 추론 능력이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같은 변화에 발맞춰 한국외대는 2024년 언어학에 AI를 융합한 ‘Language & AI 융합학부’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학부 수시 논술 전형 경쟁률은 첫해 133.14대1이었는데 올해는 183.71대1까지 치솟았다. 과거 전공 선택에서 학생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는 최근 전공 과목에 LLM(거대언어모델), 딥러닝 등을 접목한 수업들을 선보여 인문 계열 학과 중 가장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이 학교 관계자는 “AI 융합 교육에 주력하자 학생이 많이 몰려 정원을 20%가량 늘려 추가로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