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전 과목 만점자는 5명(재학생 4명·졸업생 1명)이다. 올해는 어려운 수능이었는데도 졸업생은 서울과학고 출신 1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재학생이었다. 특히 서울 지역(자사고인 세화고·일반고인 광남고의 왕정건군)뿐 아니라, 지방 일반고에서도 수능 만점자가 2명이나 나와 교육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주서석고 최장우(18)군과 전북 전주한일고 이하진(18)군이 그 주인공이다. 오랜만에 수능 만점자를 배출한 광주와 전주는 축제 분위기다. 지역 교육계에서는 “지역 공교육이 대치동 학원가를 이겼다”는 얘기가 나왔다.
5일 오전 서석고에서 만난 최군은 광주에서 10년 만에 나온 수능 만점자다. 서석고 교사들은 “대치동 학원가에 절대 뒤지지 않는 양질의 문제를 학생들에게 제공한 것이 비결”이라고 했다. 이 학교 교사들은 수능과 모의고사 기출 문제를 변형한 문제를 직접 만들어 학생들에게 풀게 했다고 한다.
예컨대 국어 교사들은 수능 기출과 EBS 교재 문제를 변형한 모의고사 문제를 만들어 매주 학생들에게 풀게 했다. 최군은 “선생님들 덕분에 학교 공부만으로 수능 대비가 가능했다”면서 “1년 반가량 수학 학원 하나 다닌 게 고등학교 때 받은 사교육의 전부”라고 말했다.
서석고 교사들은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서석고의 정규 수업은 오후 4시 20분에 끝난다. 이후에는 자율 학습이지만 3학년 학생의 80%가량이 남아 밤 10시까지 공부한다. 토요일에도 자율 학습을 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오후 6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김은식 부장 교사는 “학생들이 자율 학습을 하면서도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많은 선생님이 자발적으로 남아 있다”며 “주말에도 공부하러 오는 학생이 많아 교사들도 학교에서 주말을 보내는 게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서석고는 1974년 개교한 사립 일반고로, 광주에선 면학 분위기가 좋은 학교로 꼽힌다. 서석고 송찬국 교장은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서, 대치동이 아니라서 최고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교사들이 더 최선을 다했다”며 “공교육만으로도 입시에서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줘 다행”이라고 말했다.
최군은 “어릴 때 영어 유치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솔직히 큰 도움이 안 됐고, 제 실력은 학교가 키워준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공직자가 돼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사회가 바뀌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수시로 서울대 경제학과에 지원한 최군은 지난달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최군은 “무엇이든지 미리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데, 공부도 어떤 과목을 얼마큼 시간을 들여서 할지 미리 플래너에 계획을 세워놓고 이를 잘 수행했는지 확인하며 효율적으로 공부한 게 좋은 결과를 낸 것 같다”고 말했다.
전주한일고의 이하진군도 최군처럼 학교 수업에 매진한 ‘공교육파’다. 올해 수학 최상위권을 굳히려고 수학 학원 한 곳만 다녔을 뿐 대부분 공부는 학교에 의지했다고 한다. 이군은 중학교 때는 전교 15~25등, 이 학교에 입학할 당시엔 신입생 중 36등으로 최상위권은 아니었다. 그런데 금세 실력이 뛰어 지난 5월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받았고, 전북에서 8년 만에 나타난 수능 만점자가 됐다. 전북에서는 2000년 이래 7명의 수능 만점자가 나왔는데 6명이 졸업생이고 재학생은 이군이 처음이다.
1983년 설립된 사립 일반고인 전주한일고는 2007년부터 교사들이 개설한 수업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해 듣는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고1부터 학생이 자기 진로·적성에 맞는 수업을 선택하는 고교 학점제를 시작했는데 이 학교는 이미 18년 전에 시작한 것이다. 전주한일고 교사들은 “시대를 앞선 교육 과정이 우리 학교의 힘”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호준 진로진학부장은 “선생님 도움을 받아 학생이 스스로 진로에 맞는 커리큘럼을 짜고 부족한 과목은 집중해서 선택해 들으며 보완할 수 있다”며 “현재 운영하는 선택 과목이 149개라 학생들이 느끼기에 어떤 과목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군은 이번 수능에서 과학 탐구 영역 중 고난도로 꼽히는 물리Ⅱ·지구과학Ⅱ를 선택해 만점을 받았다. 많은 일반고가 이런 과목들은 난이도가 높아 개설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학교는 원하는 학생이 소수라도 있으면 해당 과목을 들을 수 있도록 매 학기 열어둔다.
이군은 자신의 만점 비결의 하나로 학교가 매주 주말 실시한 ‘모의고사 프로그램’을 꼽았다. 이군은 “모의고사 프로그램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실전 감각을 익혔다”고 말했다. 한일고는 전북교육청이 내놓은 ‘수능 한 등급 올리기 90일 프로젝트’ ‘학력 향상 도전 학교’ ‘순수공부’ 등 학력 신장 프로그램 지원금을 모조리 따내 학생들을 지원했다. 이 학교가 매주 양질의 모의고사 문제를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던 것도 도교육청으로부터 받은 지원금 덕분이다. 고현민 3학년 학년부장은 “주말에도 선생님들이 출근해 학생들의 모의고사 풀이를 지도하는 등 ‘학원 갈 필요 없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며 “여름 방학 기간 자율 학습 시간에도 학생들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과목을 분석해 해당 과목 선생님이 집중 지도를 해준다”고 말했다. 한영숙 교장은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평균 나이가 37.5세로 젊은 데다 학생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기 때문에 평소 교무실에도 교사보다 학생이 더 많다”면서 “결코 사교육에 아이들을 내몰지 않겠다는 젊은 선생들의 열정이 학력을 끌어올린 비결”이라고 말했다.
내과 의사가 꿈인 이군은 수시 모집에서 서울대, 가톨릭대, 성균관대 의대를 지원했고, 현재 서울대 의대 면접도 마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이군은 또 다른 수능 만점 비결로 ‘독서’를 꼽았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교 입학 전까지 하루에 꼬박 책 한 권은 읽는 ‘독서왕’이었다고 한다. 이군은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집에서 남는 시간은 대부분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며 “책을 읽으면서 기른 독해력이 언어 영역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됐고, 다양한 배경 지식을 쌓을 수 있어 다른 과목 공부에도 쉽게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