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 “배운 만큼 쓰고 오자!”
13일 오전 7시 15분 서울 마포구 홍대부속여고. 두툼한 검은색 패딩을 입은 서혜숙(77) 할머니가 등장하자, ‘엄마도 대학 간다’ ‘여보 등록금 준비해’ 등의 피켓을 든 50~80대 여성들이 응원 구호를 외쳤다. 서씨는 “수능 볼 생각에 밤잠을 설쳤는데 그래도 새벽 4시에 눈이 딱 떠졌다”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걱정되지만, 최대한 마음을 편히 먹고 시험 치려 한다”고 말했다.
서씨와 응원하는 여성들은 모두 일성여고 학생들이다. 일성여고는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여성들이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는 2년제 학력 인정 평생교육 기관이다. 작년부터 이곳에서 공부한 서씨가 올해 서울 지역 최고령 수능 응시생으로 추정된다.
전남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서씨는 어릴 때 판사가 꿈이었다.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해 당시 등록금 1만8000원과 1년 치 수업료를 면제받을 만큼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고등학교엔 가지 못했고, 꿈도 접어야 했다. 서씨는 “학교 보내달라고 날마다 울었지만, 큰 언니 병원비에 남동생 학비 등 돈 들어갈 일이 많아 부모님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이후 결혼하고 애 셋 키우면서 사는 게 바빠지니 내 아픔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서씨가 다시 공부를 하고 싶어진 건 우연한 계기였다. 재작년 12월 TV를 보고 있는데 한 예능 프로그램에 일성여고 출신으로 2024학년도 수능을 친 김정자 할머니가 나왔다. 서씨는 그걸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일성여고로 가서 곧장 등록을 해버렸다. 김 할머니처럼 본인도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간 것이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남편한테 ‘나 공부할 거야’라고 말했더니 흔쾌히 ‘알았다’고 하더라”면서 “아이들도 내 한을 알아서 그런지 다 찬성했다”고 말했다.
서씨는 평소 영어 과목을 공부할 때가 가장 즐겁다고 한다. 다른 과목들보다 공부하는 이유가 더 뚜렷하기 때문이다. “손녀들이 영국에 살아요. 자기들끼리 영어로 대화할 때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서 천천히 말해보라고 하니까 ‘할머니 이거 천천히 말한 거예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영어를 배워서 나중에 손녀들이랑 영어로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했어요. 영국에 놀러 가서 직접 영어도 써보고요.”
경기 고양시에 사는 서씨는 이날 수능 시험장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1시간쯤 걸려 도착했다. 이미 수시 모집에 지원한 백석예술대와 강서대 사회복지학과에 최종 합격했지만, 수능 시험으로 고교 과정을 마무리하고자 도전했다. 서씨는 “사회복지사가 보살피는 사람들 대부분 나처럼 나이가 많기 때문에 처지를 더 잘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겠다 싶어서 전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같은 학교에서 수능을 친 유금선 할머니도 서씨와 함께 일성여고에 다녔고 나이도 같다. 유씨는 서울 노원구 집에서 마포구에 있는 일성여고까지 왕복 4시간씩 걸리는 먼 길을 오가며 2년간 공부를 끝냈다. 유씨는 “어릴 적 고등학교를 너무 다니고 싶었지만 가지 못해 속으로 끙끙 앓았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는 게 행복했고 힘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 ‘문학 21’에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유씨는 작년 집안일을 하다 넘어져 척추를 다쳤는데 이때 꼼짝도 못하고 병원에 한동안 누워만 있었던 시간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유씨는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공부하는데 나만 못 한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며 “학교 오가는 지하철에서 그간 못 배운 부분들 공부하며 진도 따라잡느라 혼났다”고 했다. 유씨는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할 예정이다.
이날 오전 7시부터 홍대부속여고 앞에서 선배들을 응원했던 일성여고 2학년 김정숙(70) 할머니는 “수능 치는 선배들을 보니까 ‘나도 내년에 저 자리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며 “조마조마하며 시험지를 받을 때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다”고 했다. 함께 응원하던 89세 정모 할머니는 “우리가 나이는 많지만 공부할 땐 화장실도 안 갈 정도로 집중한다”며 “내년엔 나도 수능을 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