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난양공대 변환경제(Cross Economy) 연구센터 실험실 연구원들이 한데 모였다. 국적이 10곳이 넘는 학생·연구원들이 속한 이 실험실은 최근 꽃가루를 이용, 친환경 선크림을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난양공대 등 싱가포르 대학들은 실력이 뛰어난 해외 인재를 적극 유치해 세계 최정상 대학으로 성장했다./최인준 기자

박승민 싱가포르 난양공대 조교수(화학생명공학과)는 대변을 분석해 대장암을 진단할 수 있는 세계 첫 ‘스마트 변기’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변기에서 대변을 채취해 그 안에 들어 있는 암세포의 DNA를 찾는 원리다. 박 교수는 이 기술 개발로 내년 초 100억원 규모 싱가포르 국가 연구비(대학 지원금 포함) 수주도 유력한 상황이다.

암 조기 발견의 길을 열어준 이 연구는 자칫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박 교수는 2023년 인공지능(AI)으로 배설물을 분석해 건강 상태를 진단하는 연구로 미 하버드대가 선정하는 ‘이그노벨상’을 받았다. 이그노벨상은 독특한 과학 연구에 시상해 ‘괴짜 노벨상’이라 불리지만 석학급 연구자에게 주는 등 권위 있는 상이기도 하다. 당시 미 스탠퍼드대 박사후연구원이었던 그는 이 성과를 들고 한국 최상위권 대학 5곳에 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변기를 대학에서 연구하기엔 부적절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때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이 난양공대였다. 학교는 오히려 “아무도 하지 않은 세계 최초 연구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적극 지원하겠다”며 교수직을 줬다. 박 교수가 난양공대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스마트 변기 연구는 올 8월 최고 권위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에 실렸다.

그래픽=김현국

난양공대 등 싱가포르 대학은 박 교수처럼 뛰어난 연구 성과를 보이는 전 세계 젊은 인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최근 글로벌 과학 연구를 주도하는 명문 대학으로 올라섰다. 이 대학들의 인재 영입은 어느 국가보다 공격적이다. 국적·인종을 가리지 않고 세계 최초 연구에 성공했거나 뛰어난 성과를 낸 연구자가 있으면 미국·중국 대학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데려온다. 자녀의 국제 학교 학비를 지원하고, 배우자가 교수면 부부를 모두 채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패키지 영입’이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인재를 영입한 덕분에 난양공대·싱가포르국립대의 교수, 연구원, 학생 국적은 100여 곳에 이른다. 자원과 인구가 적은 도시국가라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 전략은 지금 대학의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됐다. 올해 영국 대학 평가 기관 QS가 발표한 세계 대학 평가에서 싱가포르국립대(NUS)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8위를 기록했다. 1991년 한국의 카이스트와 포스텍을 벤치마킹해 만들어진 난양공대(NTU)는 각종 대학 평가에서 한국 대학을 오래전에 추월했다. 올해 QS 평가에선 12위로 홍콩대(11위)에 이어 아시아에서 셋째로 순위가 높았다.

김건 토목·환경공학부 교수는 지난 2023년 울산과기원(UNIST)에서 난양공대로 이직했다. 김 교수는 토목 분야에선 이례적으로 초음파를 사용해 건물 안전도를 검사하는 연구를 했는데, 국내에선 이런 융합형 연구가 정부 과제를 수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싱가포르에선 화학공학, 재료공학, 의학 등 다양한 전공 교수가 한데 모여 연구할 수 있는 데다 학교도 예산을 아끼지 않아 한국에서 못 한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과에 따른 보상도 확실하다. 싱가포르 국가연구재단(NRF)은 매년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는 학자 10여 명을 국적 관계없이 선발해 50억~100억원 이상을 준다. 난양공대는 조교수도 논문 성과가 최상위 수준이면 정교수보다 많은 100만싱가포르달러(약 11억원)를 연봉으로 받을 수 있다.

이런 파격은 정부의 ‘간섭 없는 지원’과 글로벌 기업의 기부 덕분에 가능하다. 싱가포르국립대는 정부에서 13억135만싱가포르달러(약 1조4000억원·2023년)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정부에서 대학 연구·행정에 대해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람킨용 난양공대 부총장은 본지에 “싱가포르에는 글로벌 기업 본사, 해외 본부가 홍콩의 3배가 넘는 4200여 개 있는데 이 기업들과 산학 협력도 해외 인재 유치에 활용된다”며 “난양공대 캠퍼스에선 알리바바, HP, 현대차 등 글로벌 기업과 조인트랩(공동 연구소)이 운영되고 있는데 많은 연구 인력이 이곳에서 일하려고 싱가포르를 찾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