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는 지난 4일 ‘AI 3대 강국’ 도약을 위해 내년도 10조원 넘는 예산을 편성하겠다고 밝혔다.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가 GPU(그래픽 처리 장치) 26만대를 한국에 공급하기로 해 기회의 창도 활짝 열렸다. 하지만 정작 AI 산업에서 일할 인재는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한국의 AI 인재 순유입은 1만명당 -0.36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국 중 35위. 이에 업계에선 “차는 있는데 운전사가 없고, 총은 있는데 총알이 없다”는 자조가 쏟아지고 있다. 본지는 우리보다 앞서 ‘AI 인재 유출’에 시달렸지만 정부·대학·기업이 똘똘 뭉쳐 최근 반전에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 대만 사례를 긴급 진단해 그 비결을 소개한다.
최근 취재진이 방문한 국립양밍자오퉁대 정보기술서비스센터. 바깥 기온은 30도가 넘었지만, 센터 내 서버실은 반팔 차림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서버 160대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전용 냉방 시스템’이 가동된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서울대 공대조차 예산 부족으로 설치하지 못한 시설이다.
서버실 한가운데엔 중앙 AI 서버인 ‘고성능 컴퓨팅(HPC) 플랫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년 8월 30억원을 들여 도입한 시설이다. AI 연구에 최적화된 플랫폼으로, GPU 40개가 들어 있어 초당 1경7000조회의 연산이 가능하다. HPC 도입으로 대학은 자체적으로 초대형 언어 모델(LLM) 구축도 가능하게 됐다. 아시아에서 이 정도 인프라를 보유한 대학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HPC 덕분에 연구 효율이 크게 높아졌다. AI 연구를 하는 셰핑춘 컴퓨터사이언스대 교수는 “예전에 연구실에서 쓰던 GPU는 성능도 부족하고 쓸 수 있는 전력량도 한계가 있어 연구 주제 선정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면서 “HPC를 쓸 수 있게 되면서 미뤄뒀던 프로젝트를 본격 시작했다”고 말했다.
◇첨단 AI 인프라 깔자 인재 돌아왔다, 두뇌 유출에 울던 대만의 반전
양밍자오퉁대의 AI 연구 인프라는 앞으로 더 확대될 예정이다. 이 대학을 졸업한 반도체 회사 파이슨, 전자 회사 위스트론의 창업자가 타이난 캠퍼스에 630억원, 450억원을 각각 기부해 2027년까지 AI 연구 빌딩을 두 동 짓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학 측은 “동문 기업인들이 학교에 기부하는 문화가 잘 형성돼 있다”며 “단순히 빌딩만 짓는 게 아니라, 업계 전문가와 교수진이 함께 연구하면서 ‘배움과 실무가 결합된’ 인재를 양성하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만 정부도 AI 인프라 확충에 발 벗고 나섰다. 대만 국가과학위원회 산하 국가고속컴퓨팅센터가 자체 구축한 수퍼컴퓨터 ‘징촹(晶創) 25호’가 대표적이다. 징촹은 ‘반도체 기반 혁신’이라는 뜻이다. 작년 6월 가동을 시작한 징촹 25호는 엔비디아의 AI 서버(H100·H200) 37대, GPU 296개를 탑재하고 있다. 기업, 대학 모두 공모만 통과하면 사용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엔비디아가 대만에 선물한 수퍼컴퓨터 ‘타이베이 1’도 학계, 기업 모두에 열려 있다. 전체 사용량의 25%는 학계, 75%는 기업(상업)에 할당돼 있다. 젠슨 황 대표는 지난 4월 대만을 찾아 수퍼컴퓨터를 넘어 앞으로 대규모 AI 인프라 시설을 뜻하는 ‘AI 팩토리’를 선물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젠런쭝(簡仁宗) 양밍자오퉁대 전기공학과 석좌교수는 “대학과 정부, 산업계라는 3대 축이 대만 과학자들이 장기 AI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토대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연구 인프라는 글로벌 인재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대만 학계는 보고 있다. 셰핑춘 교수는 “미국 대학들은 교수들을 유치하기 위해 ‘우리 대학에 오면 GPU 몇 개를 전용으로 쓸 수 있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경우가 굉장히 흔하다”면서 “앞으로 GPU가 연구자를 끌어올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풍부한 산학 협력 기회’도 인재들의 발걸음을 대만으로 돌리고 있다. 현재 엔비디아를 포함해 AMD, TSMC, 미디어텍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대학 안에 연구 센터를 열고 활발하게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린치훙 국립 양밍자오퉁대 총장은 “대만 전자 산업의 요람인 신주과학단지의 기업 최고경영자 중 65%가 본교 출신으로, 강력한 산학 협력이 우리 대학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양밍자오퉁대에 자리 잡은 리치유(李奇育) 컴퓨터사이언스대 교수는 “반도체 산업에서 앞서가고 있는 대만 기업과의 연구 협업 기회가 풍부하다는 점이 대만에 돌아오는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텍사스 A&M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뒤 6년 전 대만으로 돌아온 셰핑춘 교수도 “기업과 대학이 양방향으로 소통하며 프로젝트와 협업을 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면서 “그런 점이 연구자들에게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대학들은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인재를 유치하려 노력하고 있다. 예컨대, 양밍자오퉁대는 인재들에게 월급과 별개로 연구실을 처음 열 때 필요한 ‘스타트업 자금’을 주고, 행정 업무를 줄여준다. 특히 신임 교수들은 행정 업무뿐 아니라 강의까지 대폭 줄여줬다. 연구 그룹 구성이나 외부 연구비 신청, 산업계나 글로벌 연구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양밍자오퉁대 컴퓨터사이언스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린신예(23)씨는 “연구 인프라가 눈에 띄게 좋아지고 산학 협력 기회도 풍부해서 국내 기업에 일자리를 얻거나 대학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굳이 외국에 유학 가지 않고 대만에 남는 케이스가 점점 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