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고등학교 교사 A씨는 지난해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한 학생이 겨울철 교복 규정을 제대로 안 지켜서 “지금 동절기 규정이 적용되는 거 모르냐”고 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동절기가 뭐예요?” A씨는 “‘과도하다’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아이들도 있더라”면서 “교과서 해석도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부산의 중학교 김모 수학 교사는 “내가 국어 교사인지, 수학 교사인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게 ‘이항(移項·다른 변으로 옮김)’ 같은 단어 뜻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진도 나가는 데 차질이 있다고 한다. 이건주 서울 오금고 국어 교사도 “사회, 과학 선생님들이 와서 ‘아이들 단어 공부 좀 시켜달라’고 하소연을 한다”고 했다.
기초학력을 못 갖춘 학생들이 지난 10년간 최대 7배로 늘었다. 교육계에선 디지털 세대의 문해력·어휘력 부족이 심각한 데다 이를 보완하는 공교육 시스템이 부실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본지와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실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의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분석한 결과, 평가 대상인 중3, 고2 학생들의 국어·수학·영어 과목의 학업 성취 수준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통’ 이상 비율은 줄고, ‘기초학력 미달’ 학생은 크게 늘어났다.
고2 국어 과목의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2014년엔 1.3%였는데 지난해 9.3%로 7배 가까이로 치솟았다. 중3 학생들 역시 국어 과목에서 2014년 기초 미달 비율은 2%였는데, 지난해엔 10%를 넘어섰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고2 수학의 경우에도 기초학력 미달 학생은 5.4%에서 12.6%로, 중3 수학은 5.7%에서 12.7%로 늘었다. 영어는 그나마 사정이 다소 나은 편이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고2는 5.9%에서 6.5%, 중3은 3.3%에서 7.2%로 늘었다.
정부는 매년 중3, 고2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를 진행해 ‘우수’ ‘보통’ ‘기초’ ‘기초학력 미달’ 4단계로 나눈다. ‘기초학력 미달’은 다음 학년에 올라갔을 때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을 말한다. ‘국포자’(국어 포기자) ‘수포자’(수학 포기자)일 가능성이 높다.
‘보통’ 이상을 받은 학생도 크게 줄었다. ‘국어’에서 보통 이상을 받은 고2 학생은 2014년 86.5%였는데, 작년엔 54.2%로 32.3%포인트나 줄었다. 고2 수학은 84.5%에서 57.2%로 27.3%포인트 하락했고, 고2 영어는 84.7%에서 72.4%가 됐다. 중3도 국어(87.3→66.7%), 수학(66.8→48.6%), 영어(75.2→61.2%) 등 모든 과목에서 ‘보통 이상’ 학생이 줄었다.
이렇게 학생들의 학력이 크게 떨어진 데 대해 현장 교사들은 “문해력 저하 탓이 크다”고 분석했다. 경력 20년 차 중학교 영어 교사 이모씨는 “학생들이 ‘기인(起因)’이라는 단어 뜻을 모르면서 영어 숙어 ‘come from은 기인하다’라고 무작정 외우니 활용할 줄 모른다”면서 “이런 학생이 10년 전에 한 반에 1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3~4명”이라고 말했다.
한국교총이 지난해 교원 5848명에게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 원인’을 물었더니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36.5%)을 가장 많이 골랐다. 2위는 ‘독서 부족’(29.2%)이었다. 한 고교 교사는 설문조사에서 “고등학생이 ‘침식’ ‘퇴적’ 같은 기초적인 단어도 모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교총 관계자는 “과목 상관 없이 기본적으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뒷받침돼야 학력을 올릴 수 있다”면서 “‘숏폼(짧은 영상)’ 중독에 독서도 안 하는 요즘 학생들의 학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명학 전 중동고 교장은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으로 맞춤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영상들에 노출되고, 디지털상에서 구어(口語)로만 소통하니 어휘 능력 저하, 그로 인한 학력 저하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디지털 중독 문제가 심각할수록 공교육에서 이를 보완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도 부족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을 조기에 발견해 맞춤 교육을 하는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는 원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치르다가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 3%만 선별해 치르는 표집 평가로 바뀌었다. ‘아이들에게 스트레스 준다’ ‘서열화를 부추긴다’는 전교조 등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후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기초학력 미달자가 급증했다. 김민전 의원은 “기초학력 진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대응도 늦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초학력 문제 해결을 학교나 교사 개인에게 맡겨두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는 “핀란드는 국가 주도로 초등학생 때부터 문해력을 측정하고 부족한 학생에겐 별도 교사를 붙여 보충 수업을 하는 시스템을 시행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정부가 ‘어휘력 향상 프로그램’부터 초등학교에서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