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서울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생존 수영 수업 시간에 VR(가상현실) 기기를 쓰고 수영 연습을 하고 있다(아래). 위 사진은 학생들이 쓴 VR 기기를 통해 보이는 가상의 수영장 모습.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전국 초등학교에 생존 수영 수업이 의무화됐지만 수영장이 부족해 VR교육으로 대체되는 등 파행을 겪고 있다./에듀포올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 100여 명을 대상으로 ‘생존 수영’ 수업이 열렸다. 그런데 학생들은 수영복을 입지도, 물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교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VR(가상현실)’ 수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VR 기기를 머리에 쓰고, 가상의 수영장에 입장해 아바타 강사의 지시에 따라 ‘물에 입수하기’ ‘물 속에서 걷기’ 동작을 따라 했다. 학교 관계자는 “학교 근처에 수업이 가능한 수영장이 3곳 있지만 학생을 인솔해 가는 게 어려운 데다, 일부 학부모들이 아토피가 생긴다는 이유 등으로 수영 수업을 반대해 VR 교육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 초등학생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생존 수영’ 수업이 부실 운영되고 있다. 생존 수영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부터 모든 초등학교에서 의무화됐다. 조난 상황에서 스스로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기본적인 수영 기초를 익히는 게 목표다. 초등 1·2학년은 이론 수업 위주로 듣고, 3학년부터는 연간 10회씩 수영장에서 실습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생존 수영이 의무화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인프라 부족과 학교·교육청의 부실 운영으로 곳곳에서 파행되고 있다.

9일 교육부와 17개 시도교육청에 따르면, 전국 6300개 초등학교 가운데 수영장을 갖춘 곳은 122곳밖에 안 된다. 이 밖에도 교육청 운영시설 40곳 등 학생들이 생존 수영을 받을 수 있는 수영장은 전국에 850곳이다. 당일 다녀올 수 있고, 단체 수업이 가능한 곳을 추린 것이다. 전국 초등학생 249만5000명이 수영을 배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대한생존수영협회가 전문 강사진을 갖춘 시설에 부여하는 ‘생존 수영 인증 수영장’은 37곳뿐이다.

이 때문에 실제 수영장에 가지 않고 ‘VR 교육’ 등 실내 교육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성동구의 한 초등학교는 지난 4월 3학년 생존수영 실습 수업 10회 가운데 6회를 ‘실내 교육’으로 대체했다. 교실에서 ‘수영 안전 수칙’이 적힌 종이를 나눠주고 종이접기를 하며 읽는 식으로 진행했다. 나머지 4차례 실습은 수영장에서 진행했지만, 풀장에서 팀을 나눠 공놀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생존 수영 교육은 샤워와 머리 말리기 등 뒤처리 과정도 중요하다. 그런데 시간도 부족하고 돌봄 인력도 없어 이 과정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서울 송파구 한 초등학교는 올 초 학생들에게 생존 수업을 갈 때 샴푸 등 샤워 용품을 가져가는 것을 금지했다. 수영장에 샤워 시설이 부족해 학생 30~40명이 동시에 씻을 수 없고, 샤워 과정을 지도해 줄 교사도 부족하니 사실상 샤워를 못 하게 한 것이다. 한 학부모는 “딸이 하교 후 학원에 갔다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까지 머리도 못 감고 다녔다”면서 “생존 수영 교육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제대로 된 인프라도 갖추지 않고 강행하니 부정적 인식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8일 대구 달서구 대구특수교육원 수영장에서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피서철 수난사고 대비 생존수영 교육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지방의 상황이 더 열악하다. 일부 지방 소도시는 수영장까지 버스로 20분 넘게 이동해야 한다. 왕복 이동 시간 때문에 실제 수업은 15~20분밖에 못하는 학교도 있다. 전남도교육청에 따르면, 작년 전남 지역 초등학교 434곳 가운데 생존수영 실습 수업을 100% 이수한 곳은 220여 곳에 그쳤다. 실습 이수율이 절반도 안 되는 학교도 80여 곳이었다.

전문성 없는 강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대한생존수영협회에 따르면, 최근 들어 생존 수업과 관련해 비선수 출신들이 세운 각종 협회가 난립하면서 생존수영 관련 강습 자격증만 100개가 넘는다. 이 중 상당수는 하루 교육 과정을 듣는 것만으로 자격증을 발급받는다고 한다.

수영 국가대표 출신인 한병서 대한생존수영협회장은 ”실제 조난 상황에선 구명조끼를 못 입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본 등 선진국에선 맨몸으로 물에 뜰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며 “VR 같은 실내 교육은 물의 부력과 저항에 대한 경험 없이 시각적으로만 수영 방법을 이해하기 때문에 실전 생존 기술을 익히기 어렵다”고 했다.

☞생존수영 수업

교육부가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전국 초등학교에 의무화한 수업. 초등학생들이 각종 수상 안전사고에 대비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수영 기술을 가르친다. 1·2학년은 이론 수업, 3학년부터 연 10차례 수영장 실습 교육을 받도록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