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이화여대 영어영문학부는 한국 사회에 수많은 여성 리더를 배출하며 엘리트 교육의 중추 역할을 했다. 사진은 지난 1966년 이대 영문학부 학생들이 학교 영학관(英學館·학생들이 서양 예법과 생활 영어 등을 배우던 건물)에서 선교사 교수들과 영어로 토론하는 모습. /이화역사관

“여러분, 우리 이화 영문의 새로운 100년도 많관부(많은 관심 부탁)입니다!”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ECC 이삼봉홀. 이화여대 영어영문학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행사에 학부 졸업생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누군가 “이화 영문!”을 외치자 환호가 쏟아졌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원로 동문부터 20·30대 졸업생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행사장 대형 스크린에 학부생 시절을 담은 사진과 선후배들의 인터뷰 영상이 나올 때마다 참석 졸업생들은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한 50대 졸업생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영문학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하고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대 영어영문학부는 1925년 4월 24일 이화여대 전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전) 문과로 출발했다. 이화여대는 1886년 5월 미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이 설립한 이화학당으로 시작해 올해로 139주년을 맞았는데 지금과 같은 대학 학과 형태로 정식 학생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대 영문학부는 국내에 최초로 세워진 영어영문학과이기도 하다.

23일 이화여대 영어영문학부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윤혜영(왼쪽부터) 쿠팡 리테일 부문 대표, 양옥경 초록우산 대표이사, 유중근 경원문화재단 이사장, 김영기 미 조지워싱턴대 명예교수, 장필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신숙원 서강대 명예교수, 방송인 이숙영씨. /이화여대

지난 100년 동안 이대 영문학부는 한국 여성 고등교육의 중추 역할을 해왔다. 지금까지 학사 졸업생 약 1만명과 석박사 졸업생 660여 명을 배출했다. 1970~80년대에는 여학생들이 1순위로 지망하는 최고 인기 학과였다. 오랜 시간 뛰어난 인재들이 거쳐가면서 영문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영어영문학회 첫 여성 회장을 지낸 나영균 이대 명예교수,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등 이대 영문학부 출신 영문학자들은 후학 양성과 연구·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 영어영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대 영어영문학부는 지난 2012년 세계 100대 영어영문학과(영국 QS 세계 대학 랭킹)에 선정되기도 했다.

영문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 리더들이 이곳을 거쳤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고(故) 이희호 여사를 비롯해, 이효재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를 공동 설립한 윤정옥 이대 명예교수 등 여성 인권 운동가들이 많았다. 1925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윤 명예교수는 건강상 이유로 이날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장필화(74년 졸업)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은 “이대 영문학부 졸업생 중에 사회 지도자들이 유독 많은데 형편이 어려운 출소자를 돕는 단체 ‘흰돌회’를 만든 윤정은 교수님, 방학 때에도 위안부 실상을 알리는 데 노력하신 윤정옥 교수님처럼 한국 사회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면서 배운 영향이 크다”고 했다.

이대 영문학부 출신들은 ‘한국 여성 최초’ 기록도 다수 남겼다. 대한적십자사 첫 여성 회장(유중근·67년 졸업), 한인 여성 최초 미 연방 노동부 차관보(전신애·65년 졸업), 최초 여성 국립중앙극장장(신선희·68년 졸업) 등이 그 주인공이다. 50년 동안 미국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한 김영기(63년 졸업) 미 조지워싱턴대 명예교수는 “이대 영문학부는 50·60년대에도 외국인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세계화를 강조해 다른 학교 학생보다 더 큰 꿈을 품을 수 있었다”고 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모친인 김문희(49년 졸업) 학교법인 용문학원 명예이사장, 허창수 GS 명예회장의 부인인 이주영(75년 졸업) 남촌재단 고문도 이대 영어영문학부 출신이다. 보험 업계 첫 여성 사장에 올랐던 손병옥(74년 졸업) 전 푸르덴셜생명 회장, 윤혜영(96년 졸업) 쿠팡 리테일 부문 대표 등 기업인 동문도 늘고 있다. 정치·법조·방송·예술계에서도 이대 영문학부 졸업생의 진출이 활발하다. KBS 아나운서 출신 황정민(93년 졸업)씨는 “은사인 정덕애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영국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 ‘Pied Beauty’(얼룩진 아름다움)를 낭독해 주신 게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며 “학생 한 명 한 명이 독창성을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와 도움을 주신 선생님들의 열정이 지금까지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대 영어영문학부는 이날 기념행사뿐 아니라 설립 100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공연, 전시를 열고 있다. 이달 말까지 이대 ECC 대산갤러리에서 영문학부 역사를 기록한 ‘개척해 온 100년, 개척해 갈 100년’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1930년 만들어져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학부 내 영어 연극 동아리 ‘빙즈(Beings)’는 지난 3월 재학생·졸업생이 함께 100주년 기념 공연으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무대에 올렸다. 이날 이대 영문학부는 각계에 진출한 동문들이 모여 차세대 여성 리더 양성 방안을 논의하는 ‘영어영문 100주년 미래 위원회’의 출범식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