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입양인 박주희(27)씨는 올해 추석을 친모, 이모들과 함께 보냈다. 대구에서 태어난 직후 미국으로 입양된 박씨가 친모와 함께 맞는 첫 추석이다. 그는 몇 년 전 입양모가 세상을 떠나며 친모를 찾기 시작했다. 올해 친모와 연락이 닿았고 이달 초 입국해 만났다. 박씨는 “친모와 점심을 함께 먹고 차도 한 잔 마셨는데 꿈같은 시간이었다”며 “엄마 얼굴이 기억나진 않지만 막상 만나니 그저 편안하더라”고 말했다.
지난 14일 찾은 서울 종로구 북촌문화센터에는 박씨를 포함해 해외 입양인 30여 명이 모였다. 사단법인 해외입양인연대가 보건복지부 지원을 받아 추석을 앞두고 ‘모국 방문’ 행사를 연 것이다. 이들 중 이번에 가족을 찾는 데 성공한 이는 4명이다. 미국으로 입양됐던 박두영(42)씨는 “친부모는 돌아가셨지만 형제, 친척들은 만날 수 있었다”며 “나는 ‘본질적으로 속한 곳이 없는 사람’이라는 트라우마가 이번에 해소된 느낌”이라고 했다. 미국으로 입양된 강미선(32)씨는 “며칠 전 만난 친부모가 평생 나를 떠나보낸 것을 후회하고 걱정하고 기도했다고 말씀하시더라”며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던 인생의 숙제를 끝내 평안하다”고 말했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지금껏 17만명에 달하는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가 모국을 떠나 해외에서 자랐다. 어느새 대부분 중장년(中壯年)이 된 이들이 친가족을 찾겠다고 나선 건수가 작년 역대 최다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친가족에게 환영받든 외면당하든 가족 찾기라는 ‘평생의 숙제’를 어떻게든 풀겠다고 나선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서적, 경제적으로 자립을 달성한 해외 입양인이 늘어나며 친가족을 찾아 나서는 경우가 앞으로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 보고 있다.
실제 복지부 산하 아동권리보장원에 따르면, 해외 입양인이 자신의 출생·부모 정보를 요청한 건수는 2021년 1327건, 2022년 2045건, 2023년 2720건으로 해마다 증가해 작년 역대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매년 ‘친부모의 동의 여부 확인 불가’ 등 사유로 정보를 요청한 해외 입양인 3명 중 2명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다.
◇가족 찾기는 ‘평생의 숙제’
본지가 인터뷰한 해외 입양인 24명은 모두가 길게는 수십 년간 자신의 친가족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앞선 사례처럼 실제 친가족을 만나는 데 성공한 이는 7명에 불과했다.
미국 입양인 카라 슈뢰더(49)씨는 2017년부터 한국을 오가며 자신의 친부모를 찾고 있지만 아직 별 소득이 없다. 출생 직후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부모가 누군지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는 “올해는 한국 경찰청을 찾아가 실종자 유전자(DNA) 데이터베이스에 제 DNA를 등록해 보려고 한다”며 “혹시 실종 신고가 돼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여러 차례 소외감을 느꼈다. 그 사회에 받아들여지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좌절하며 우울증을 안고 살았다고 했다.
네 살 때 노르웨이로 입양된 토마스 뤼셍(46)씨는 아들(9)이 자라는 것을 보며 친가족 찾기를 결심한 경우다. 그는 “친부모가 나를 입양 보낸 것에 화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이해한다”며 “단지 나를 왜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 가난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묻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현재 암 투병 중인 뤼셍씨는 “너무 늦기 전에 친부모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20년 넘게 가족 찾기에 매달리는 이도 있다. 미국 입양인 로버트 앤더슨(53)씨는 1999년부터 수시로 한국을 오가며 입양 관련 기관을 찾고 DNA 검사만 4번을 받았지만 아직 소득이 없다. 그는 “입양인이 가족을 찾을 수 있게 돕는 제도가 너무 부실해 작은 정보라도 하나 얻으려면 너무 큰 비용과 시간이 든다”고 했다.
해외입양인연대 측은 “특히 해외 입양이 절정에 달했던 1970~1980년대는 서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친부모가 이미 사망했거나 정보 공개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정보 열람이 안 돼 가족 찾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알 권리 보장” 정부 상대 소송도
덴마크 입양인 이현조씨는 지난 7월 아동권리보장원을 상대로 자신의 친부모 정보를 공개하라는 내용의 정보 공개 청구 소송을 냈다. 해외 입양인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첫 소송으로 알려졌다.
입양특례법 36조에 따르면, 입양 기관 등은 친부모의 동의를 받아야만 입양인에게 친부모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 다만 친부모가 사망하는 등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정보 공개가 가능하다. 이씨는 친부가 사망하고 친모가 생존한 상태인데, 아동권리보장원이 ‘친모 동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정보를 공개하지 않자 ‘알 권리 침해’라며 소송을 낸 것이다. 이씨는 본지에 “정보를 요청해도 ‘안 된다’는 답이 돌아오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고 거부 사유도 잘 알려주지 않는다”며 “이번 소송은 저뿐만 아니라 가족 찾기에 어려움을 겪는 수만 명의 입양인을 위한 소송”이라고 했다.
아동권리보장원은 입양인이 정보 공개를 청구하면, 친부모에게 등기우편을 발송해 동의 여부를 묻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집 주소가 틀리거나 우편을 받지 못하는 등 이유로 확인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해외 입양인 가족 찾기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인 행정을 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정부는 내년 7월부터 각 입양 기관에 흩어진 입양 기록물을 아동권리보장원에 한데 모아 관리할 예정인데, 이 역시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해외 입양인들은 한국 정부 차원에서 ‘입양인 가족 상봉을 위한 DNA 은행’ 사업을 추진해 달라고 요구한다. 각국 재외공관이 나서서 입양인 DNA를 채취하고, 이를 한국 정부가 보유한 실종자, 전사자 가족 찾기 DNA를 이용해 대조해 달라는 것이다. 입양인 지원 시민 단체 ‘작은행복’을 운영하는 네덜란드 입양인 시모나 은미(40)씨는 “현재는 입양인들이 개별로 경찰과 아동권리보장원, 입양 기관, 병원 등 각종 기관을 직접 찾아가 정보를 요청하는데, 이 기관들을 연계한 가족 찾기 전담 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