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차스 바운트라(왼쪽 사진) 영국 옥스퍼드대 혁신부총장과 이건우(오른쪽 사진) 디지스트(DGIST·대구경북과기원) 총장이 ‘인공지능(AI) 시대 대학의 역할과 교육 혁신’을 주제로 대담을 나누고 있다. /전기병 기자

“옥스퍼드대는 코로나 때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와 협업해 9개월 만에 백신을 개발했고, 결국 인류의 팬데믹 탈출에 큰 역할을 했죠. 이제 대학이 교육과 연구에만 몰두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팬데믹이나 기후변화 등 지구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가’를 길러내야 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차스 바운트라(64) 혁신부총장이 지난 8일 서울에서 이건우(69) 디지스트(DGIST·대구경북과기원) 총장을 만나 ‘인공지능(AI) 시대 대학의 역할과 교육 혁신’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전국에 5개 있는 과학기술특성화대학 중 하나인 디지스트가 10일 설립 20주년 기념 포럼 연설자로 바운트라 부총장을 초대했다. 생긴 지 불과 20년 된 대학과 1096년 개교한 세계 최고(最古) 대학 중 하나인 옥스퍼드대가 ‘대학의 혁신’을 놓고 머리를 맞댄 것이다. 옥스퍼드대는 전통이 큰 자산이지만 꾸준한 혁신으로 여전히 많은 대학이 벤치마킹하고 있다. 바운트라 부총장은 옥스퍼드대의 산학 협력과 혁신 사업을 총괄한다. 디지스트는 학부 신입생을 받기 시작한 2014년부터 모든 학생을 전공 구분 없이 선발하는 등 교육 혁신을 이끌어온 학교다. 올해 QS 세계대학평가에서 326위(국내 9위)에 올랐다.

-왜 대학의 역할이 달라져야 하나.

차스 바운트라(이하 바운트라)=사회가 대학에 기대하는 역할이 달라졌다. 내가 대학에 다닌 1980년대만 해도 ‘산업’이란 단어는 금기어였다.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라고만 여겨졌다. 하지만 코로나19 백신 개발 과정에서 경험했듯, 이제 대학은 사회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길 요구받는다. 정부는 향후 4~5년만을 고려하고 정책을 만들지만, 대학은 50~100년 후를 상상하고 연구할 수 있다.

이건우(이하 이)=저출생으로 인구는 줄어들고, 지방에 있는 기업체들은 인재를 구하지 못해 고민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이 학문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만 할 순 없다. 대학이 나서 지역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떤 혁신을 하고 있나.

바운트라=옥스퍼드대의 혁신은 수백 년간 이어진 독특한 학사 시스템에서 나온다. 옥스퍼드대엔 각 전공이 뒤섞인 39개 ‘칼리지’(소규모 학문 공동체)가 있는데, 학생들은 4~6명 규모 소그룹으로 지도 수업을 받으며 고전학, 지리 환경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운다. 이곳에서 학생들이 숨을 공간은 없다. 자연스레 자기 주장을 펼치고 반박하는 능력을 습득하게 되는데, 이 집중 양성 시스템을 통해 세계적 리더들을 배출해냈다.

이=디지스트의 가장 큰 특징은 개교 이래 ‘무(無)학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전공 구분 없이 입학한 뒤, 2학년 때부터 8개 전공 트랙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들을 수 있다. 매 학기 바꿔 들을 수도 있다. 덕분에 모든 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많으면 3~4개 전공 트랙을 공부하게 된다.

-수요자인 학생과 기업은 ‘대학의 교육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운트라=옥스퍼드대는 지난 10년 사이 ‘문화 혁명’을 겪고 있다. 2015년 학내 기업 투자펀드인 ‘옥스퍼드 사이언시스 이노베이션(Oxford Sciences Innovation)’을 만들었는데, 초창기 4~5개 수준이던 학내 기업 창업이 이젠 매년 30개씩 생겨나고 있다. 옥스퍼드대 학생들은 이제 점점 더 ‘대학 학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많은 영국 총리를 배출한 사회지도층 코스인 ‘PPE’(철학·정치학·경제학 융합전공)도 인기가 낮아졌다. 대신 ‘사업 계획 작성법’ ‘프로젝트 관리법’과 같은 문제 해결 능력을 배우고 싶어한다. 이들을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혁신가들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처럼 말이다.

이=졸업생 중 5%는 창업을 한다. 디지스트는 학부 3학년 때부터 4~5명씩 팀을 이뤄 1년간 분야별 팀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무학과로 입학해 다양한 수업을 듣고, 프로젝트 수업을 들으며 아이디어를 내면서 창업 역량이 길러지는 것이다.

-애초 우수한 학생이 입학하기 때문에 성과가 좋은 것이 아닌가.

바운트라=일부 인정한다. 그렇다고 세계적 명문대만 혁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담수화’ 기술에 있어선 사우디 대학들이 옥스퍼드대보다 훨씬 더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다. 지역별 강점을 살리거나, 대학별 통합을 통해 혁신은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정보가 넘치는 AI 시대, 대학 졸업장의 가치도 줄어든 것 같다.

바운트라=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이젠 대학에서 4년 동안 배운 지식만으로 평생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온라인 강의 기반의 평생교육을 늘려 우리가 가진 자원과 지식을 세계에 공유하려고 한다.

이=가장 큰 문제는 아직도 학생이 듣고 싶은 수업이 아닌 ‘교수가 하고 싶은 수업’ 위주로 개설된다는 것이다. 내년부턴 해외 대학의 온라인 강의를 들어도 학점으로 인정해주고, 이를 ‘자기설계전공’의 일부로 구성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학생 중심으로 학사제도를 바꿔 과목 선택의 폭을 넓혀주자는 취지다.

-최근 한국에선 우수한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

바운트라=젊은 세대에겐 금전적 보상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 것 같다. 세계적인 현상이다. 솔직하게 접근해야 한다. 내 주변 공학 교수들은 3~4개 회사를 설립해 수많은 돈을 번다. 학문도 상업화가 필요하다. 대학이 학문 연구를 통해서도 금전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계획은.

이=지역 산업체에 도움이 되는 대학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내년 3월엔 경북 구미시에 공학전문대학원이 개원한다. 인근 산업체 직장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회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를 하게 하고, 졸업생들에겐 전문 석사학위를 준다. 대구엔 AI·빅데이터·블록체인 분야 연구 캠퍼스를 짓고, 대구의 ‘판교’ 역할을 하는 기술 허브로 키우려고 한다.

☞차스 바운트라 옥스퍼드大 부총장

영국 옥스퍼드대의 산학 협력과 대학 혁신 사업을 총괄하는 혁신부총장.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제약 산업에서 19년간 근무한 뒤 2008년 교수로 부임했다. 항암 치료제 등 약물 개발에 참여했고, 글로벌 제약사 GSK(글랙소스미스클라인) 부사장을 지냈다.

☞이건우 디지스트 총장

컴퓨터지원설계(CAD)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교육 행정 전문가. 경기고,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서울대 교수에 임용됐고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 대한기계학회 회장, 한국공학교육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