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고교학점제 시범 학교(선도 학교)’로 지정돼 2년째 운영 중인 경기도 A고교는 수강 신청에 앞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절대 공강(강의 사이 빈 시간) 없이 시간표를 짜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원래 고교학점제 취지대로라면 학생들이 각자 시간표를 짠 뒤 공강 시간에 교내 자습실이나 휴게실에서 머물며 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A고교 교사는 “심지어 지금은 특정 과목에 수강 신청 인원이 몰리면 성적 낮은 애들 몇몇 불러서 ‘넌 그냥 다른 과목 들으라’고 하고 있다”며 “고교학점제 시범 학교의 70%는 이처럼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다.
현 중학교 2학년이 고교에 입학하는 2023년부터 적용되는 ‘고교학점제’를 둘러싸고 교육계 우려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공통 과목을 이수하면 대학생처럼 고등학생들이 진로와 흥미에 따라 과목을 선택해 듣고 기준 학점을 채우면 졸업하는 제도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표 교육 공약이자 핵심 국정 과제다. 교육부가 당초 2025년부터 전면 시행한다고 발표했지만, 지난 8월 이를 번복하고 2023년부터 적용하겠다고 밝히면서 시행 시기가 2년이나 앞당겨진 상태다.
그런데 전면 시행을 1년여 앞두고 학교 현장에서 “고교학점제를 먼저 적용 중인 시범 학교(937교)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전교조는 지난 4일 고교학점제 반대 기자회견에서 “고교학점제를 적용 중인 연구·선도 학교가 겪고 있는 혼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라며 “고교학점제가 학교에 재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고교학점제의 취지대로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학생들이 학교가 짜주는 시간표에 따라 학급별로 나뉘어 수업을 듣고 있지만, 고교학점제에서는 학생들이 진로·적성에 맞춰 자기 시간표를 설계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시범 학교에서는 수능 등 대학 입시에 직결되는 과목이나 학습 부담이 작은 과목 등에 수강 신청이 몰려 일부 학생은 아예 수업을 듣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 또 일부 학교에서는 교사가 선택 과목 범위를 지정해주고 시간표를 짜라고 해 정작 원하는 과목은 듣지 못하기도 한다.
자녀를 고교학점제 시범 학교에 보내는 고2 학부모는 “의약학 계열을 지망하는 아이가 수학 관련 진로 선택 과목을 신청했는데, 학교에서 ‘수강 신청 인원이 초과됐고 교사가 부족하니 이해해달라’며 체육 과목 수강을 권하더라”며 “자기 진로·적성과 전혀 다른 과목을 듣게 되는 상황을 아이 혼자 오롯이 감당하는 게 고교학점제냐”고 했다.
시범 학교들 사이에서는 교사들이 담당해야 할 과목 수가 갑자기 늘어 교육 질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많다. 선도 학교인 인천 B고등학교는 수업할 교사가 부족해서 한문 교사가 사회 과목을 가르치고 기술·가정 교사가 미술을 가르치는 황당한 일도 생겼다. B고등학교 교장은 “고교학점제를 전면 시행하면 선택 과목 수가 늘고 교실도 더 필요할 텐데, 지금 학교 교실이 너무 부족해 옥상까지 개조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까지 들더라”고 했다.
고교학점제가 2023년 시행되면 가정이나 학원에서 일찌감치 진로·적성 지도를 받은 학생들이 고교 생활에서 훨씬 유리해질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교육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은 교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다양한 과목을 개설할 수도 없다. 신현욱 한국교총 정책본부장은 “고교학점제는 그에 걸맞은 학교 공간 조성과 교원 확충을 반드시 먼저 해결하고 시행해야 한다”며 “대선 공약이라고 무조건 시행 시기를 못 박고 고교학점제를 밀어붙이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말했다.
☞고교학점제
공통 과목을 이수하면 대학생처럼 진로와 흥미에 따라 과목을 선택해 듣고 기준 학점(192학점)을 채우면 졸업하는 제도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표 교육 공약이자 핵심 국정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