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간 성폭력 사건에서는 경제활동 등 피해자가 독립적 생활을 했는지와 관계없이 가해자에 대해 장기간 누적된 심리적 예속 관계 때문에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준강간죄 구성 요건인 항거불능 상태의 범주를 친족간 성폭력 사건에서는 보다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취지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2015~2018년 조카를 수 차례 성폭행해 준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지난 1일 사건을 유죄 취지로 대전고법에 돌려보냈다.
판결문에 따르면, 피해자 B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가 이혼했고, 아버지 손에 자라던 중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마저 사망하게 됐다. B씨의 외삼촌인 A씨는 1999년부터 B씨를 자신이 운영하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거주하며 일할 수 있도록 하고, 같은 해 당시 19세였던 B씨를 처음 성폭행했다.
이후 그는 2018년까지 약 19년간 반복적으로 B씨와 성관계를 맺었다. 이 사실을 숨겨오던 B씨는 2018년 지인의 권유로 경찰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고, 사건을 넘겨 받은 검찰은 A씨가 친족관계에서의 지위와 B씨가 심리적 항거 불능상태에 빠진 점을 악용해 성폭력을 가했다고 보고 지난 2019년 그를 재판에 넘겼다.
1·2심 재판부는 “B씨가 실질적으로 (성폭행에) 저항하지 못할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며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B씨가 성관계에 동의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B씨가 2009년부터 직장생활을 했고, A씨의 집에서 출퇴근을 한 점, 2015~2016년에는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동생과 관광을 가는 등 꾸준히 외부활동을 한 점, 2016~2017년 A씨의 집이 리모델링 공사를 할 때 약 한 달간 직장 동료 집에서 거주한 점 등을 고려했다. B씨가 A시로부터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고 외견상 평범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여, A씨에게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피해자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14살 연상의 피고인에게 의존해 생활해 왔다”며 “상당 기간 경제적으로도 피고인에게 예속돼 있던 피해자는 외부와 단절된 채 피고인의 성적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고 체념해 응하는 상태가 됐다”고 밝혔다. 2009년부터 B씨가 직장생활을 시작했더라도 이는 외형상의 일부 변화에 불과하며, 오랜 기간 누적된 심리적 지배와 공포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친족관계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 가족내 위계, 경제적·정서적 예속, 사회적 낙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사례가 많다”며 “장기간 형성된 지배관계와 내면화된 두려움 때문에 (B씨가) 저항하지 못한 것은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친족관계에 의한 성폭력의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를 판단하는 구체적인 기준을 새롭게 제시한 사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