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주씨가 얼굴 공개를 원치 않아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었다. 김씨는 “피고인의 방어권은 보호받으면서 피해자의 방어권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나는 피해자인데 법원에 내 피해의 심각성을 구걸하고 눈치 보며 ‘잘 봐주세요’ 아첨을 떨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고 했다./김지호 기자

“범죄와 아무런 관련 없는 반성, 인정, 불우한 가정환경이 도대체 재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겠다는데 왜 판사가 마음대로 용서를 하겠다고 하는 겁니까. 사법부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지난해 10월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 가림막 뒤 참고인의 질타에 장내가 숙연해졌다. 참고인 김진주(가명·28·프리랜서 디자이너)씨는 일명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그는 2022년 5월 새벽 귀갓길에 일면식도 없는 30대 남성에게 무차별 폭행당하고 바지 지퍼가 열린 채 실신한 상태로 발견됐다. 검찰은 1심에서 가해자에게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20년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가해자의 반성 등을 이유로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김씨가 끈질기게 재조사를 요구한 끝에 2심에서는 검찰이 강간 등 살인미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해 징역 20년으로 형량이 늘었고, 이 판결은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1년 4개월간 투쟁의 기록을 최근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라는 책으로 펴낸 김씨를 지난 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160㎝가 채 안 되는 자그마한 체구. 활짝 웃으며 활달한 부산 말씨로 “만난 기념이에요” 하며 푸른색 폼폰국화 한 송이를 내밀었다.

◇피해자인 나, 사법부는 ‘방해물’로 여겨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굴하지 않고 투쟁했다. 맞서 싸운 이유는.

“나는 피해자인데 마치 사법부가 나를 ‘방해물’로 여기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다. 내가 뭔가를 알고 싶다고 하면 법원 직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피해자는 재판의 당사자가 아니에요.’ 형사사건의 원고는 검사이기 때문이란다. 경찰이 개인 정보라며 가해자 이름도 알려주지 않아 재판 방청을 가서야 이름을 확인했다. 공판 기록 열람 및 등사를 요청했지만 판사에게 거절당했고, 공소장 열람만 겨우 허락받았다. 법원에서 재판 기록을 보려면 가해자에게 민사소송을 걸어 문서 송부 촉탁을 하라고 해서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상 정보가 가해자에게 노출됐다. 구치소에 있는 가해자가 내 주소를 달달 외우며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했다는 걸 가해자 감방 동기들이 출소해 내게 알려주더라. 1심 중간에 CCTV 등 재판 기록을 요청했는데 1심이 다 끝나고야 받을 수 있었다. 재판부가 귀찮아했고, 잡음이 생기지 않길 바라서라 생각한다.”

–가해자 전 여자 친구와 친해져 재판 기록 일부를 받아볼 수 있었다고 했는데.

“피고인 방어권 덕에 피고인은 대부분의 재판 기록 열람이 가능하다. 가해자의 전 여자 친구는 가해자를 숨겨준 혐의로 공범이 되어 피고인 신분이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에게 연락했는데 첫마디가 ‘미안하다’였다. 남자들끼리 다퉜다는 가해자 말만 믿고 숨겨줬다고 하더라. 그가 도와줘 일부 재판 기록을 볼 수 있었다. 가해자에겐 국선 변호사가 있었는데, 내겐 없었다. 성범죄 피해자는 국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지만 1심에서 가해자의 성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 24개월 카드 할부로 수임료를 결제했다.”

◇‘12년 뒤 저는 죽습니다’ 글 써 사건 공론화

–온라인 게시판에 ‘12년 뒤에 저는 죽습니다’라는 글을 올려 사건을 공론화했다.

“1심 재판에서 가해자가 받은 형량은 12년이었다. 검찰이 구형한 20년보다 8년이 적었는데, 가해자가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했기 때문이라 하더라. 사법 체계에 배신당한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형량이 올라갔을 텐데. 많은 범죄 피해자들이 너그러운 양형 기준에 절망하며 ‘판사가 살아 있는 피해자를 죽였다’고들 말한다. 1268장에 달하는 가해자 관련 재판 자료를 받아보니 거짓말투성이였다. 법정에서 가해자가 너무 차분한 게 이상했는데, 전과 18범으로 사법 체계의 모든 혜택을 다 받은 사람이었다. 소년 보호처분, 반성, 인정, 합의 등. 사법 체계가 만든 ‘괴물’이었다. 반성, 인정, 심신미약, 초범 등으로 디스카운트해 주는 ‘형량 아웃렛’에 얼마나 익숙해졌겠나. ‘범죄자가 시스템을 학습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감형이 다른 피해자들을 낳을 수도 있으니까.”

–가해자의 성범죄 가능성을 조사해 달라고 검찰과 법원에 요구했다.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알고 싶었다. 모든 범죄가 그렇지만 특히 살인(미수)죄는 동기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범행 당시 CCTV를 보니 7분의 사각지대가 있었다. 속옷이 벗겨져 있었던 것 등 성범죄 정황이 있었다. 나는 범행 충격으로 당시 기억을 잃었다. 2심 공판 전부터 나는 성범죄가 추가돼야 한다고 했고, 공판 때 검사님이 바지에서 검출된 DNA 재감정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항소심에서 공소장도 없는 죄명을 대상으로 추가적인 감정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2020년 5월 22일 부산 서면에서 발생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 당시, 피해자를 따라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온 가해자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갑자기 돌려차기를 하고 있다(왼쪽 사진). 가해자는 쓰러져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어깨에 메고 CCTV가 없는 곳으로 가(오른쪽) 성폭행을 시도한 것으로 조사됐다. /유튜브

–언론 보도 이후 법원의 태도가 확연히 바뀌었다고 책에 썼다.

“한 방송사 시사 프로그램이 내 사건을 보도한 이후 두 번째 공판이 열렸는데 재판부가 갑자기 피해자 탄원서를 봤다며 DNA 재감정을 허락해 줬다. 진짜 씁쓸했다. 이래도 사법부가 과연 독립적인 기관인가. 사법부가 제 할 일을 하면 어떤 피해자가 시간 들여가며 언론을 찾겠는가.”

–국민 신문고에 법원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는데.

“‘신림동 공원 살인 사건’ 가해자 최윤종이 ‘부산 돌려차기 사건’을 모방한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내가 CCTV 영상을 언론에 공개한 영향일까봐 마음이 너무 괴로웠는데 유가족들은 오히려 그런 생각하지 말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런데 ‘부산 또래 여성 살인 사건’ 가해자 정유정 사건을 맡은 재판부가 ‘부산 돌려차기 사건 모방 범죄 사건 등이 일어나고 있으니 자극적인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했다’는 뉴스가 떴다. 그 재판부가 바로 내 1심 재판부였다. 내가 언론을 찾은 게 재판 기록을 보여주지 않은 1심 재판부 때문이었는데, 감히 판사가 내게 잘못했다고 하다니…. ‘모방 범죄는 영상 때문이 아닌 판사님들의 너그러운 양형 기준 때문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가해자 아닌 세상의 시선과 싸워

–본인이 성범죄 피해자라는 걸 입증해 공소장을 변경했다. 여성으로서 쉬운 일이 아니다.

“1심 끝날 때까지 성범죄는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건 당시 입었던 바지에서 가해자 DNA가 검출된 것 같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기쁘면서도 눈물이 났다. ‘성범죄 피해자라는 걸 내가 스스로 세상에 알렸네’ 싶어서. 법정에서 바지를 다시 봤는데 구멍이 송송 나 있었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대검 유전자 감식실에 121부위의 광범위한 정밀 감정을 지시했다고 하더라. 바지 안쪽서 가해자 DNA가 나왔을 때, 담당 검사인 김태훈 검사가 결과를 알려주며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사건 이후 가해자 전 여자 친구에 이어 내가 받은 두 번째 사과였다. 나는 정작 가해자랑은 싸운 적이 없다. 사람들 시선, 언론, 경찰, 법원과 싸웠고 결국 나 자신과도 싸웠다. 외롭고 힘들었다.”

–가해자 공판을 방청하러 법원에 간 경험을 적으며 “나는 법원에서 가장 밝고 색채로운 사람이었다”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처음 재판정에 갔을 땐 위축돼 있어서 모자도 쓰고 후줄근하게 하고 갔다. 돌이켜보니 그 모습이 너무 싫었다. 내가 그 누구보다 ‘멋진 피해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반항심이 들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이런 피해자도 있다는 걸 재판부에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두번째 공판부터는 최대한 화려하고 근사하게 꾸미고 갔다. 화장도 진하게 하고, 원피스도 입었다. 튀는 가발을 쓰고 간 적도 있다. 죄수복 차림의 가해자에게 ‘너는 패션에 선택권이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나중에 가해자가 ‘피해자X이 법원에 원피스를 입고 왔더라’고 발언했는데, 내 전략이 ‘먹혔다’ 싶었다. 너는 감옥에 있는 거지 궁궐에 있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씨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살아 있어 다행… 다른 피해자 도울 수 있으니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과 통화한 이야기를 책에 적었다.

“지난해 대법원이 2심 결과를 확정한 후 박용진 민주당 의원, 조정훈 시대전환(현 국민의힘) 의원 등에게서 국감 출석 제안이 왔다. 조정훈 의원이 법무부 국정감사 때 한동훈 장관에게 영상 편지 보낼 기회를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유튜브 라이브로 국감을 봤는데 한 장관이 내 영상 끝난 후 조 의원에게 질의받고 ‘피해자께서 많이 부족한 점을 느낀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하더라. 잘못 들은 건가 했다. 법무부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민간인인 내게 죄송하다니. 눈물이 핑 돌았다. 매번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회피하며 잘잘못을 따지기 바빠하는 사법체계였는데 장관이 내게 사과를 하다니, 진짜 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장관님이 전화를 걸어와 피해자 보호 제도가 미흡한 점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길래 ‘메일로 정리해 보내겠다’ 했더니 흔쾌히 메일 주소를 주셨다. 그간 준비했던 내용을 A4 8장짜리 문서로 정리해 보냈다. 2차 피해(보복 범죄)를 막고, 사건과 관련 없는 양형 기준을 빼고, 피해자들의 알 권리를 챙겨달라고 했다. 말만 하고 끝나는 거 아닐까 불안했는데 법무부에서 범죄 피해 지원 TF를 만들더라. ‘결국 윗사람이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깨달았다.”

–한 전 장관이 책에 추천사도 썼던데.

“장관이었으면 공직자라 못 쓰는데 그만둬서 써줄 수 있다고 했다더라. 그만두셔서 다행이다(웃음).”

–당신 덕에 피해자 재판 기록 열람·등사를 강화하는 개정안도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당신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인가.

“내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버티고 싸웠다. 피해자들이 숨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피해자들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내가 죽었어야 법이 바뀌었을텐데’,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살아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다른 피해자들을 도울 수 있으니. 가해자가 20년 후 출소하니 내 삶엔 20년의 ‘유통기한’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삶을 가성비 있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20년 뒤에 죽을 사람에게 돈이 중요할까, 명예가 중요할까. 내일 당장 내가 죽어도 아쉽지 않은 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면서 많이 치유받았다.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메시지, 그 일념이 흔들리지 않아 힘들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2022년 5월 22일 새벽 귀가하던 김진주씨를 30대 남성이 무차별 폭행하고 성범죄를 저지른 사건. 작년 9월 대법원에서 가해자에 대해 강간 등 살인미수 혐의로 20년형이 확정됐다. 김씨가 피해자 권리를 위해 노력해 피해자가 재판 기록을 열람·복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강화하고, 가해자 신상 공개를 확대하는 등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 개정안이 최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