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중인 윤성근 부장판사를 위해 동기가 펴낸 칼럼 모음집 '법치주의의 불꽃'

담도암 말기로 투병중인 윤성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언론 기고문 등을 모은 디지털 서적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이 출간됐다. 법원 내 대표적인 국제법 전문가로 통하는 윤 부장판사는 담도암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했지만 최근 재발했다. 현재 상태가 악화돼 말기에 이르렀고, 말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그래서 저자가 발간 취지를 밝히는 책의 서문은 날짜와 이름만 적힌 백지 상태다.

392쪽에 달하는 이 책은 사법연수원 동기인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48시간만에 만들어냈다. 법원 내 대표적인 IT전문가인 강 부장판사는 최근 아들 결혼식에도 겨우 참석한 윤 부장판사의 상태를 보고 출간을 결심했다고 한다. 사법연수원 동기 187명이 모인 단톡방 등에서 추천사를 받았고, 윤 부장판사의 언론 기고문 및 판결 기사 등을 모아 48시간만에 마무리했다.

윤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문이 백지인 이 책의 추천사는 34개에 달한다. 추천사마다 윤 부장판사의 평소 인품을 기리며 쾌유를 기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연수원 시절 저는 수업하는 범위 외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지만 윤원장은 미국법 원서를 읽으며 홀로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기억이 선합니다. (중략)그렇게 같이 지내온 윤원장이 얼마전부터 병마와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보니 안타깝고 가슴아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전 서울고등법원장·서울중앙지법 원로법관 김창보)

“원장님과 함께 근무했던 2년동안 점심 시간은 늘 철학과 역사와 문학을 넘나드는, 그야말로 지적 자극으로 충만한 인문학 강의 시간이었고, 재판은 치밀하면서도 친절하게 당사자의 공방을 경청하는 시간이었으며, 합의시간은 혹여나 나의 부족함이 부장님의 예리한 눈에 들키지는 않을까 긴장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조인영 연세대 로스쿨 교수·전 부장판사)

“최근 법조인의 기본정신도, 정치인들의 기본 양심도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특히 동기생들의 이름이 세간에 흩날리는 요즘 14기라는 우리들의 소중함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가운데 그의 옥고는 한 줌의 청량제였으며 상대적 정의가 아닌 절대적 정의가, 제한된 자유가 아닌 무제한의 자유가 용트림하는 옥고들이다”(전 국회의원·변호사 이기문)

이 책은 종이책으로도 발간될 예정이다. 종이책 판매 수익금은 전액 윤 부장판사의 치료비로 쓰인다. 책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 1000만원은 천고법치문화재단(이사장 송종의)이 지원한다. 송종의 전 법제처장은 퇴직 후 변호사 개업 대신 귀농활동을 택해 ‘밤나무 검사’로 통한다.

윤 부장판사는 언론 기고문을 통해 형사절차 전반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노력해 왔다. 어떤 사안에서도 법과 원칙에 따르는 법관의 기본 자세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형사절차를 통해 달성하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는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자는 사회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건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빨리 범인을 잡아 엄벌하기 바란다. 이런 대중의 심리에 터잡아 정치인과 검찰은 거악을 척결해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한다. 죄지은 자를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정의감은 위험한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확산 초기 강제수사로 특정 신도의 명부를 확보하는 등으로 ‘방역 독재’ 우려가 나왔던 상황에 대한 차분한 시선도 담았다. ‘펜데믹, 국가의 역할 그리고 인권’이라는 글에선 “종교의 사이비성을 누가 어떤 절차로 판단할지도 모른다. 정치 권력이 재량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중략) 긴급하다는 이유로 적절한 보호조치를 강구하지 않은 채 종교 구성원 전원의 개인 정보를 공개하도록 명령하고 예배 장소를 강제 폐쇄하기까지 했다”며 “정보 누출과 구성원 일부의 자살, 해고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며 “그러나 관련자들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남부지법원장을 지내고 일선으로 돌아와 재판중이던 윤 부장판사는 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전문가회의 대한민국대표단을 지낸 국제법 전문가다. 최근엔 서울고법에서 재정사건 재판부를 맡아 검찰 불기소 판단이 정당한지를 다시 따지는 업무를 했다. 작년 10월에는 수술실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한 ‘권대희 사건’의 성형외과 원장에 대해 의료법 위반 기소 결정을 했다. 책을 편집한 강 부장판사가 그가 등장한 언론 기사를 일일히 스크린샷으로 전자책에 담았다.

강 부장판사는 “과거 대법관 이상 최고 법관이 퇴직하면 기념 논문집을 함께 근무한 판사들 중심으로 헌정했지만, 이 책에서 어떤 최고 법관 퇴직기념 문집보다 소중하고도 깊이 있는 글들을 담았다”며 “표지 글씨 중 불꽃이 이어져 붙어 있는 것은 저자의 여명이 이어지를 원하는 소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