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일 오후 영덕군 영덕읍 창포풍력발전단지에 있던 풍력발전기가 도로에 쓰러져 있다. /뉴스1

높이 80m, 날개 길이 40m에 달하는 대형 풍력발전기가 ‘폴더폰’처럼 접힌 후 그대로 도로변에 주저앉았다. 당시 승용차를 덮칠 찰나의 순간, 한 운전자는 아찔한 사고 현장을 벗어난 뒤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달 2일 오후 4시 40분쯤 경북 영덕 해안가 공원 언덕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바람은 초속 6.4m. 태풍급도 아닌 평범한 수준이었다.

28일 전기안전공사와 영덕풍력발전 등 합동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고 발생 한 달 보름이 지나도록 타워 구조물(기둥) 붕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알람 센서 고장 정황과 사고 당시 발전기가 감지한 주변 풍속이 초속 6.4m인 점 외 뚜렷한 사고 원인이 될 단서는 없다고 한다.

영덕 풍력발전기 붕괴 사고는 발생 직후부터 미궁 속에서 헤맸다. 사고 원인을 규명할 핵심 단서인 ‘디지털 블랙박스’를 국내에서 직접 분석할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운영사 측에 따르면 사고 발전기는 블레이드(날개)가 먼저 파손된 뒤 균형을 잃고 붕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풍속은 발전기 정상 가동 범위(초속 3~20m) 내 안정적인 수준이었다. 문제는 날개가 왜 부서졌는지다.

풍력발전기 제조사인 덴마크 베스타스(Vestas) 기술진은 지난달 13일 영덕 사고 현장에서 ‘스카다(SCADA·원격 감시 제어)’ 데이터를 확보해 분석에 착수했다. 전기안전공사와 운영사 요청으로 사고 발생 12일 만이다. 항공기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스카다는 수집된 데이터를 암호화해 저장하는 장치다.

지난달 2일 오후 4시 40분쯤 영덕 창포리 풍력발전단지 내 21호기 발전기가 기둥 중간 부분이 꺾이며 도로 쪽으로 쓰러졌다. 당시 현장을 지나던 한 운전자가 전화 통화를 위해 차량을 갓길에 세웠을 때 차량 블랙박스에 거대한 발전기가 쓰러지는 모습이 포착됐다. /독자 제공

전기안전공사와 영덕풍력발전은 제조사의 분석 결과를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분석을 시작한 지 44일 지난 현재까지도 제조사 측은 뚜렷한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보증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에서다.

영덕풍력발전 관계자는 “날개 속도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알람 센서가 작동하고 제어해야 하는데 고장이 나면서 날개 파손 영향으로 기둥이 꺾인 것 같다”며 “센서 이상 원인과 관련해 제조업체가 보증 기한 경과 등을 이유로 협조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블랙박스 있어도 ‘깜깜’… ‘데이터 종속’

정확한 원인 규명을 위해선 ‘스카다’ 데이터 분석이 필수적이다. 스카다는 발전 출력과 회전수뿐만 아니라 진동·충격·토크(회전력)·온도 변화 등을 1~10초 단위로 기록·저장한다. 사고 직전 제어 시스템 오작동 여부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하지만 국내 풍력발전 운영사와 조사 당국은 이 데이터를 온전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발전량이나 풍속 등 기본 운전 정보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사고 규명에 필요한 고해상도 센서 데이터나 고속 데이터는 제조사의 독점 소프트웨어와 암호화 기술 없이는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영덕풍력발전 관계자는 “국내 기술로는 스카다의 상세 운용이나 심층 데이터 접근에 한계가 있다”며 “결국 제조사가 직접 분석해 결과를 내놓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달 2일 오후 영덕군 영덕읍 창포풍력발전단지에 있던 풍력발전기가 기둥이 꺾인 채 도로에 쓰러져 있다. /뉴스1

◇반복되는 제조사 ‘셀프 조사’… 안전은 뒷전

이 같은 데이터 종속 구조로는 ‘깜깜이 조사’만 되풀이되는 실정이다. 국내 풍력발전기 타워 붕괴 사고는 총 3건이다. 앞서 2016년 3월 강원 태백시 삼수동 풍력발전기 사고와 지난해 4월 전남 화순군 금성산 사고 역시 정상 작동 중 갑자기 기둥이 꺾여 쓰러지는 형태였다. 그러나 두 사고 모두 추측만 무성할 뿐 명확한 원인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특히 첫 사고로 알려진 태백 사고는 상업 운전 4년 만에 발생했고, 화순 사고는 2년 1개월 만에 발생했다. 영덕 사고의 경우 20년을 넘긴 설비에서 발생한 점 등을 종합하면 타워 붕괴 사고는 설비 노후 여부와 관계없이 불상의 이유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 조사는 대부분 제조사가 주도하고, 결과는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부 관계자조차 “화순 사고 조사는 제조사 자체적으로 진행해 그들만 결과를 알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국가가 데이터 접근·분석권 강제해야”

2024년 기준 국내 육상이나 해상에 설치된 풍력발전기는 모두 857기. 학계와 전문가들은 더 큰 사고를 막으려면 정부가 직접 사고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항공기 사고처럼 조사위원회가 핵심 데이터를 확보해 독자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대용 국립군산대 풍력에너지학과 교수는 “사고 원인 규명에 필요한 분석 정보가 거의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원인 규명이 제한적인 것이 현실”이라며 “정부와 전문 기관이 조사 주도권을 갖고 제조사에 데이터 공개를 강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현재 영덕 사고 현장에는 정부 산하 기관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이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해 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제조사가 핵심 정보를 빼고 알려주거나, 협조마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명확한 사고 원인은 장기간 규명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