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손가정에서 자라던 10대 소년이 선배의 지속적인 협박과 감금, 폭행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가해자가 한 살 많은 선배로 드러나면서 검찰은 최근 그를 구속기소했다.
조선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8월 19일 오전 7시쯤 경북 안동의 한 아파트 15층 옥상에서 A(16)군이 목을 맨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됐다. A군 시신은 이 아파트보다 더 높은 지대에 사는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당시 A군의 사망을 개인 사정에 따른 변사 사건으로 판단해 사건을 종결하고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했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던 과정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장례식장에 온 A군 친구들이 A군 아버지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아이가 아니다” “선배에게서 잦은 협박과 구타를 당해왔다”고 말한 것이다. A군 아버지는 “구체적인 정황을 글로 남겨달라”고 요청하자, 친구들은 선배에게 폭행을 당한 상황과 금전 요구가 반복됐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작성해 건넸다. 진술서를 작성한 A군 친구는 9명에 이른다.
이 진술서를 토대로 A군의 아버지가 경찰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수사가 재개됐다. 경찰 수사 결과, A군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넣은 인물은 1년 선배인 B(17)군으로 밝혀졌다.
B군은 A군이 숨지기 약 한 달 전인 7월 중순쯤 125cc 오토바이를 강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B군은 중고 오토바이를 70만원에 구입한 뒤 140만원에 A군에게 넘겼다. 당시 A군이 가진 돈은 70만원. 나머지 금액은 기한을 정해 갚도록 요구했다. B군은 대금을 모두 받은 뒤에야 명의를 이전해주겠다고 했다.
돈이 없던 A군은 오토바이로 치킨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벌어 들인 돈이 생길 때마다 B군에게 건넸지만, 수입이 일정치 않아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B군은 “제때 안 갚으면 죽인다”고 협박하며 주먹과 발길질을 이어갔다. 한 차례는 여관에 감금된 채 무차별 폭행을 당했고, A군은 전화로 이모에게 도움을 요청해 40만원을 빌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오토바이 대금을 모두 갚은 뒤에도 B군의 집요한 요구는 멈추지 않았다. B군은 ‘연체료’를 이유로 추가 금액을 요구했고, 돈을 주지 않으면 가슴과 배를 발로 차는 등 폭행은 이어졌다.
맞지 않으려고 A군은 주변 선배와 친구에게도 20~30만원씩 빌려 B군에게 건네기도 했다. 수시로 갚아도 끝없는 B군의 주먹질. 이렇게 뜯긴 돈은 급기야 500만원에 달했다.
지난 8월 14일의 경우 오토바이를 타고 대구에 도착한 A군은 B군에게 온몸을 구타당했다. “왜 내 오토바이를 타고 타지까지 왔는냐”가 때린 이유였다. 당시 이 장면을 목격한 A군 친구는 “너무 맞아 쓰러진 후에도 친구를 계속 때렸다”고 말했다.
A군이 숨지기 이틀 전인 8월 17일 오후 8시쯤 “안동댐 근처에서 무면허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출동한 경찰은 A군을 무면허 운전 혐의로 입건하고 오토바이도 압류했다. A군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더는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B군의 보복과 폭행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A군이 극단적 선택을 결심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자살 시도 당일 새벽, A군은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죽으러 가니 유언을 받아 적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A군은 “못난 내가 먼저 간다. 할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말을 울먹이며 전했다. 여자 친구도 울면서 말렸지만 통화는 갑자기 끊겼고, A군의 유언은 A4 반쪽 분량에 달했던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확인됐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새벽 1시쯤 B군은 자신 명의로 돼 있던 오토바이를 경찰 지구대에서 찾아 170만원에 처분한 것으로 조사됐다. 숨진 A군이 돈 주고 산 오토바이를 타인에게 판 것이다.
경찰은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B군의 휴대전화를 3개월 간 포렌식 분석 끝에 폭행과 협박, 공갈, 감금 등의 혐의를 입증해 검찰에 송치했다.
소년범 사건은 피의자 장래를 위해 대부분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다. 하지만 대구지법 안동지원은 지난 11월 21일 “증거 인멸과 도망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검찰은 지난 15일 B군을 구속기소했다.
숨진 A군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협박·폭행에 몰리다 죽음을 선택한 A군과 구속된 B군 모두 학교를 중퇴한 뒤 사회에서 알게 된 사이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은 방치된 갈등이 10대 두 소년의 죽음과 구속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법조인은 “보호 체계 밖에 놓인 청소년들 사이 갈등과 폭력에 제때 개입되지 못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